2021년 9월 26일
나는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로 살면서 지금까지 병아리 한 번 키워본 적이 없다. 그러다 한 달 전부터 집 앞에 사는 아기 고양이 까만이를 만났다. 까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 까미라는 길냥이가 있는데 몇 년째 건강하게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까미랑 비슷하게 이름을 지으면 까만이도 잘 살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날 어서 만지라고 몸을 뒤집는 까미와 달리 까만이는 굴 속을 나오지 않고 사람만 보면 도망가지만.
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인데 까만이는 바로 앞 마루 아래(?) 같은 곳에 산다. 너무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 팀원들에게 보여줬더니 고양이를 키우시는 팀장님이 까만이가 눈병에 걸려 있다고 하셨다. 사실 누가 봐도 눈이 퉁퉁 부어있었는데 고양이가 처음인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다행히 약을 먹이면 바로 낫는다는 팀장님의 조언에 나는 인생 처음으로 동물 병원에 혼자 가서 약을 받아오게 되었다. 까만이 사진을 보여 드리니 아직 태어난 지 두 달이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하셨다. 너무 작고 말랐는데도 겁이 많은 나는 까만이를 결코 만질 수 없으므로 어떻게 먹일지 굉장히 긴장했었다. 다행히 츄르에 섞어서 그릇에 놓아주니까 잘 먹어줘서 1주일 동안 약을 먹고 눈이 말끔하게 나았다. 이런 게 재택의 행복이구나. 나는 점심시간이면 집 앞에 나가 까만이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를 잘 모르지만 종종 보던 길냥이들과 까만이는 다른 점이 많다. 일단 이렇게 일정하게 한 곳에만 있는 애는 처음이고, 이렇게 겁쟁이인데 순한 애도 처음이다. 까만이는 사람이 오면 무조건 도망가고 무슨 뱀파이어처럼 마루 앞 블록을 넘지 못한다. 그런 주제에 '까만아'하고 부르면 밥 달라고 굴 속에서 혼자 씩씩하게 나오는 게 웃기다. 옆 동에 사는 다른 집 아기 고양이들은 까만이보다 어린데 이미 나무 타고 쥐 잡고 난리 난 와중에 까만이는 밖에 나오지 못하고 안에만 있다. 사냥놀이를 시켜주면 좋다길래 또 장난감을 사서 매일 놀아주고 있지만 여전히 밖으로 거의 못 나오고 순하기만 하다. 고양이답게 바닥을 긁는 거 같길래 스크래쳐를 사줬더니 그 위에서 잘 놀지만 여전히 공격력 제로. 놀다가 내가 인사를 하면 벽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다.
무지한 나지만 사실 길냥이한테 밥을 주려면 중성화도 시켜야 한다고 어디서 본 기억 때문에 중성화 정보는 처음부터 열심히 찾고 있었다. 열심히 검색한 끝에 온갖 고심을 하면서 5-6개월이 되면 중성화를 시켜주기로 결심했는데 문제가 있다. 까만이만큼 나도 겁이 많아서 까만이를 아직 잡지 못하는데 병원에는 어떻게 데려가는 것이지? 암컷이면 8개월 넘어서 중성화라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더 있는데 까만이가 수컷이라는 것을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하지만 수컷이 수술이 훨씬 간단하대서 다행이다.
그다음 문제는 귀다. 길냥이는 중성화 수술을 하고 나면 한쪽 귀 끝을 잘라서 표시를 한다. 그건 아픈 것도, 불쌍한 것도 아니고, 길냥이를 위한 일이라고 적혀있던데 나는 도저히 말짱한 까만이 귀 끝이 잘리는 걸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또 열심히 찾아보니 6만 원을 주고 구청에 등록을 하면 귀 끝을 안 잘라도 된다고 했다. 기꺼이 6만 원을 내기로 결심하고 잠시 마음을 놓았다.
아니 근데 또 유튜브를 보다 보니 중성화 수술 지원금을 노리고 아직 나이도 안 된 아기들까지 막 잡아서 중성화를 시키거나, 중성화는 안 시키고 귀 끝만 잘라서 방사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귀만 두 번 잘리고 중성화는 되지 않아서 임신한 고양이도 있었다. 까만이는 경계가 엄청 심하지만 그래도 작은 아기 고양이니까 지원금 노리는 사람들한테 잡혀서 고생하면 어떡하지? 소심한 나의 고민 다시 시작되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까만 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유난히 걱정이 많던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되는 참이다.
"근데 행복해. 너무 행복해. 이게 사랑인가 봐."
엄마가 왜 날 키웠는지 알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웃었다. 내일도 눈을 뜨고 집 앞에 나가면 까만이 가 무사히 있게 해 주세요. 미래에 이 글을 내가 읽어도 슬프지 않게 해 주세요. 8월 29일에 처음 까만 이를 봤는데 한 달만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당장이라도 데리고 살고 싶은데 상상 이상으로 엄마의 반대가 심해 요즘 매일 싸우는 중이다. 결국 나의 집 매매 작전을 뒤로하고 그토록 싫어하던 월세라도 알아볼까 하고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지만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안다. 까만이는 갈수록 자라 가는데, 시간이 얼마 없다.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처음에 만났을 땐 아픈 것만 고쳐주고, 무사히 어른이 되게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엄마가 경고한 대로 너무 정이 들어버렸다.
까만이를 보느라 큰맘 먹고 작사 학원까지 한 달 쉬게 됐다. 3일 전부터 까만이는 내 바지에 꼭 붙어서 굴 밖에 찔끔 나온다. 쭈그려 앉은 내 다리가 꼭 숨숨집인 것처럼 내 다리 밑에 숨어서 밖을 구경한다. 츄르 먹거나 사냥 놀이할 때만 겨우 안 피하는 정도였는데 어느새 내 옆에 와서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개냥이가 됐다. 원래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까만이 성격 때문에 입양은 엄두도 못 냈지만, 어쩌면 입양을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너무 멀어도 지인이 추천해준 행신동 아파트를 살까. 그래서 까만이랑 독립할까. 나는 동물도 처음이지만 독립도 처음이다. 까만이가 블록을 못 넘어간다고 답답해할 때가 아니다. 겁쟁이 인간. 나이 헛 먹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