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7일
오늘은 까만이가 평생 함께할 가족을 만난 날. 내가 까만이를 만난 지는 딱 60일이 되는 날이다. 원래 지난주 금요일이 입양일이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날부터 까만이가 많이 아파서 중환자로 입원하게 되었다.
범백이라는 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까만이 중성화 수술 문의를 하면서였다. 아직 까만이는 5개월이 되지 않았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중성화 수술을 좀 앞당기려 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원래 까만이 월령의 고양이들은 예방 접종을 3차까지 맞아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고양이의 세계엔 범백이란 아주 치명적인 병이 있어서 중성화 수술을 하기 전에 접종을 마치는 게 좋다고 했다. 어떤 병원은 범백 접종을 하지 않은 고양이는 중성화 수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까만이는 정말 겁이 많은 고양이다. 이제는 친해져서 까만이를 쉽게 안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은 병원에 데려오겠지만, 그 뒤로 까만이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수의사 선생님과 논의 끝에 소중한 한 번의 찬스는 중성화 수술에 쓰기로 했다. 범백 1차 예방 접종을 한 후에 중성화 수술까지 마친다는 계획이었다.
그사이에도 길냥이 까만이의 삶은 날이 갈수록 위험으로 가득해서 까만이의 영역을 수시로 위협하는 할머니 고양이가 나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3시에 까만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뛰쳐나갔더니 까만이가 얼굴에 흙 범벅이 되어서 떨고 있었다. 중성화를 하고 입양 글을 올리면 더 좋다는 팀장님의 조언에 수술만을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나는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해서 아침이 되자마자 사내 게시판에 입양 글을 올렸다. 같은 회사 사람들이면 좀 더 믿고 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월세를 구해 까만이와 독립할 각오였다. 내심 그걸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까만이에게 더 좋은 운명이 있었는지, 그날 밤 몇 번 같이 일한 적이 있던 직원 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집도 넓고 방도 많고, 첫째 고양이가 이미 살고 있는 환경이었다. 고양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나보다 훨씬 까만이에게 좋은 미래여서 이별은 슬프지만 기뻤다. 일사천리로 입양이 결정되어서 내 쪽에서 중성화 수술만 시키고 예방 접종은 새 가족이 데려간 후에 맞기로 했다. 다행히 까만이 몸무게가 중성화 수술이 가능해 바로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까만이는 길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드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건강한 상태라고 했다. 중성화 수술도 무사히 잘했고 일주일 정도 입원했다가 새로운 가족을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멀쩡하던 까만이가 입양 날 열이 오르더니 범백 양성 판정을 받았다.
예방 접종이 안 된 범백 길냥이. 원래라면 받아주는 병원조차 없지만 까만이는 계속 입원 상태였기 때문에 병원에서 중환자 입원으로 전환시켜주셨다. 의사 선생님은 지금은 입양보다도 사는 게 더 먼저라고 오늘과 내일이 제일 위험하다고 말씀하셨다. 24시간 병원이 아니라 저녁에는 진료를 봐주시는 선생님이 없지만 사망할 경우 연락은 드린다는 무서운 말도 전달받았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나는 울면서 밤새 범백 영상을 보았다. 병원에서 전화가 올까 봐 두려웠고, 까만이가 고양이 별로 갈까 봐 너무 괴로웠다. 그 괴로운 마음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어서 글로 표현도 되질 않는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게 가장 비슷한 말이려나.
새 가족이 지어주신 까만이의 이름은 (오)레오다. 하얀색과 검은색 털이 섞인 턱시도 고양이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첫째 고양이와 돌림자 이름을 한참 고민하시던 입양 가족 분들이 최종적으로 정한 그 이름에 나는 또 마음이 찡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겐 이름을 음식으로 지어야 오래 산다는 미신이 있기 때문이다. 고집하던 돌림자도 포기하고 음식 이름을 선택한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병원에 등록된 까만이의 이름도 레오로 변경했다. 그 덕분일까. 레오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혈청이랑 수액이랑 항생제를 왕발이 되도록 매일 맞으면서 고비가 될 수도 있다던 시기를 나쁜 증상 없이 견뎠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일주일간 같이 울고 마음 졸이던 레오의 새 가족 분들이 레오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레오가 나를 만나서 로또 맞은 거라고 하는데 나는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레오라는 로또를 만난 것 같다. 처음부터 착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병원 가서도 얌전하고, 목욕시켜도 얌전하고, 입원 생활 적응도 잘하고, 무슨 치료를 해도 잘 받고, 다른 고양이가 다가와도 잘 지냈다. 고맙게도 범백도 이겨냈다. 효자 인정. 오늘 새 집에 가자마자 밥도 츄르도 물도 잘 먹고 형아랑도 잘 지내는 걸 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지난 60일 동안 하루 빼고 매일 레오와 함께 했다. 이런 게 사랑인가 생각하는 순간이 너무 많았고 고작 60일밖에 안 되었는데 마음이 이런 것이 신기했다. 레오의 눈을 볼 때면 레오가 나를 너무 사랑한다는 게 느껴져서 행복했다. 앞으로 한 동안은 고양이 키울 생각은 못할 것 같다. 레오야. 항상 묘연을 꿈꿨는데 내 앞에 나타나 줘서 너무 고마워. 걱정이 많은 나인데 항상 다 잘해서 안심시켜준 것도 고마워.
나는 울보라 이별이 슬플 줄 알았는데 범백 때문에 하도 마음고생을 해서인지, 가족 분들이 보내주신 영상이랑 사진들을 보니까 정말 하나도 슬프지 않고 행복했다. 우리 레오 꼭 무사히 어른 고양이가 될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이제 나 없이도 멋지게 어른 될 수 있겠지? 성묘가 된 레오도 너무 기대돼. 사랑해 나의 첫사랑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