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30일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최은영, 쇼코의 미소 (한지와 영주)
나는 기억력이 무척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초등학교 6학년 때 반 여자아이들끼리 놀이터에 모여 학교에서 좋아하는 남자애를 다섯 명씩 뽑았는데 누가 누굴 몇 순위로 좋아한다고 말했는지 모두 기억할 정도였다. 친구들은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냐고 즐거워하다가도 진실을 아는 나를 땅에 묻어버려서 수치를 갚겠다고 분개하곤 했다. 언론고시생 시절 PD 오디션을 볼 때면 나는 나를 CCTV라고 소개했다. ‘저는 24시간 내내 모든 것을 기록하는 CCTV처럼 기억력이 좋고 관찰력이 뛰어나서 일상 속에서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세상의 이면을 잘 찾습니다.’
그런데 나의 이 진기명기 기억력에 흠이 가기 시작한 것은 공황장애 약을 먹고 나서부터다. 겨우 새끼손톱의 반의반보다도 작은 그 약은 마취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를 졸리게 하더니 노래 제목, 드라마 제목을 시작으로 단골 가게명, 회사 동료의 이름, 연예인 이름도 까먹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면서 나는 녹화된 영상처럼 잘 기억하는 내 재능이 최은영 작가의 말처럼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다. 행복했던 일들이 잊히지 않아서, 이미 내 손 안을 떠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도 너무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내가 사랑했던 인생의 챕터가 끝나는 것이 싫었다. 기억은 노력하지 않아도 생생해서 오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덩그러니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했던 기억력이 떨어지자 마음은 두려웠고 생활은 불편해졌다. 고작 일주일 치의 다꾸를 몰아서 하는 건데도 내가 월요일에 무슨 일을 했는지, 화요일에 어딜 갔는지 기억해내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잊지 않으려고 생전 안 쓰던 다이어리를 더 열심히 쓰게 됐다. 원래라면 좀처럼 할 생각 없던 회고 글쓰기도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
일주일간 보고 듣고 느낀 것 속에서 부유하는 나의 단상들, 예전이라면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수년 뒤까지 기억에 남아 나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수만 가지 스쳐가는 감정, 창작자로서 세상에 나누고 싶은 화두, 나의 꿈. 하지만 이제 나는 메모하고 일지로 남기지 않으면 그것들이 영영 내게서 사라질 수 있다고 느낀다.
일요일에 딱 한 번, 일지를 쓴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의 삶은 12주 전과 정말 많이 달라졌다. 가장 고민이 많고, 의욕이 없고, 작아지고, 혼란스럽고, 깜깜했던 시기를 나는 매주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나올 수 있었다. 줄어가는 과거의 기억들을 현재를 사랑하며 채운다. 그토록 문을 찾아 헤맨 인생의 다음 챕터가 어느새 내 앞에 열린 기분이다. 두려워도 끝까지 걸어 나가기를. 기쁨도 슬픔도 기억하면서 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