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과 이별한 자의 청승맞은 첫 출근

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2

by 지금을

대표님과 면접 본 바로 다음 날 나는 출근하게 되었다. 먼저 입사가 확정된 동기와 출근일을 맞추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갑작스러웠지만 걱정도 고민도 두려움도 없었고 딱히 설렘도 없었다. 덤덤히 첫 출근길에 나섰던 거로 기억한다. 출근 시간은 아침 여덟시 반. 스타트업치고는 빠른 편이었다. 일찍 와서 아침을 함께 먹는다고 했다. 자리에 앉아 조금 기다리자 대표님 면접 전 만났던 여자 면접관분이 파마머리를 흩날리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 회사의 본부장이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한 본부장은 한 마디 했다.

"너 대표 면접에서 울었다며? 센 캐릭터일 줄 알았는데 안 되겠네"

면접 때만 해도 표준어로 존댓말을 쓰던 그녀는 부산 사투리를 쓰며 바로 말을 놓았다. 나이 차가 꽤 있었기 때문에 불쾌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나는 이제 잡힌 물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함께 첫 출근이었던 동기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이름을 묻는 것 외에는 대화하지 않았지만 둘이라서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우자 스탠드업 미팅이 시작되었다. 회의실에 빙 둘러서서 오늘 하루 무슨 일을 할지 한 명씩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한국 마케팅팀은 중국 마케팅팀과 함께 진행한다고 했다. 이때 나는 생뚱맞은 포인트에서 놀랐다. 내가 마케팅팀? 마케팅이라니 평생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팀원들이 명함을 나눠주는데 직책에 마케팅 매니저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왜 콘텐츠 스페셜리스트를 모집한다는 채용공고 속에서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전혀 연상시키지 못했을까. 지원 부문에 예능 PD, 드라마 PD만 선택하던 내겐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였다. 대학 시절 공모전에서나 보던 단어. 이제 그 단어가 나를 표현하는, 나의 업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실감이 되었다. 꿈은 끝났다. 이제 더는 PD가 될 수 없어.


스탠드업 미팅이 끝나고 주방에서 다 함께 모여 배달된 아침을 먹었다. 첫날의 아침은 샌드위치였다. 동기와 나는 이 회사에서 공식채용으로 뽑은 첫 케이스라 했다.

"드디어 얼굴을 보네요"

우리가 들어오기 전 200여 명의 서류를 보느라 마케팅팀이 정신없었다며 다른 팀원이 말을 건네왔다. 나를 두고 연예인 누구를 닮은 것 같다고 아이스브레이킹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텃세 없이 다들 친절했다. 긴장하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샌드위치를 맘 편히 해치운 것으로 보건대 이건 추억 미화가 아니다.


그 뒤로는 HR 담당자의 온보딩 프로세스(신규 입사자 교육)가 이어졌다. 내게 처음인건 스타트업만이 아니었다. 전통 미디어 외길만 걸어오신 나는 모바일 앱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해서 아직은 낯선 우리 서비스의 비전에 대해 비장하게 설명하는 HR 담당자의 말이 부담스러웠다. 회사엔 말도 안 되는 고스펙들이 많았다. 밖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나는 공부 좀 하는 아이였는데 여기선 손톱도 내밀 수 없었다. HR 담당자는 다른 데서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친구들이 더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이곳에 모인 이유는 비전을 믿기 때문이라 했다.

'이거 무슨 종교야? 나 지금 전도 당하고 있는 건가?'

단언컨대 나는 이 서비스가 성공하리라 판단하고 그 비전에 감명하여 로켓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매일 같이 들리던 언론고시 카페에서 채용공고를 봤고 내 경력이 우대받을 수 있을 분야인 것 같아 지원했고 운 좋게 합격했을 뿐이다. 낮다고 말하는 이곳의 연봉은 조연출 바닥을 구르던 나에겐 굉장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나에겐 이곳이 꿈이 아니라, 오히려 꿈을 버리고 피신해온 조건 좋은 회사였다. 비전을 믿지 않는 나도 이 회사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 막막해졌다.


복잡한 마음으로 첫날의 교육을 마친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영어로 소개 메일을 썼다. 당시 사무실에는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들이 함께 일하고 있어 전체 메일에는 영어를 써야 했다. 영어 공부를 등한시한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네이버 사전을 참고삼아 떠듬떠듬 메일을 써내려갔다.

안녕? 내 영어 이름이 그럴듯 하지만 사실 나의 영어는 엉망이야. 여러분과 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영어 공부를 할게요. and I hate 김밥.

아무말대잔치로 메일을 보냈는데 기쁜 일이 생겼다. 영상 편집을 할 줄 안다는 내 소개 메일을 보고 미국팀의 한 멤버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미국 리쿠르팅을 위해 영상을 기획하려고 하는 데 조언을 얻고 싶다고 했다. 여기서도 영상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너무 신난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열심히 타사 영상을 보며 자료 조사를 했다.


그러나 내 모니터를 슬쩍 본 한국 마케팅팀 멤버 덕분에 나는 곧 회의실에 끌려갔다.

"너 그런 일 시키려고 뽑은 거 아니야. 그건 걔 일이야."

동기와 나를 한국 마케팅팀의 비밀병기로 생각한다는 본부장님은 나에게 단호히 말했다. 미국팀 멤버에게는 알아서 전달할 테니 그 일을 중단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앨리스가 되어 이 이상한 나라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짱구를 굴렸다.

'여기도 부서 간 리소스 협업 문제가 민감한 건가? 스타트업이라고 해서 회사에 필요한 일은 뭐라도 다 함께 하는 건 아닌가?'

그런다고 당장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 뒤에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미국팀 멤버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느낌이 왔다. 아마 본부장님은 뭣도 모르고 일을 떠맡을 위기인 나를 보호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사정을 몰랐던 나는 첫날 유일하게 회사에 정 붙일 만한 계기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아직 PD 시험을 준비 중인 대학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근할 때만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제 정말 PD는 될 수 없다는 게 현실로 확 와닿는 거야. 나 진짜로 노력 많이 했는데"

후배에게 너라도 꼭 꿈을 이루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소파 위에 누워서 한참을 생각했다.


놀랍게도 꿈의 좌절로 불행한 건 단 하루뿐이었다. 둘째 날부터 나는 근심 없이 아주 똥꼬발랄해졌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언론고시생이 있다면 안심하고 다음 편을 봐도 좋다. 우리는 반드시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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