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자유와 기회', 스타트업 최고의 복지에 대하여

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24

by 지금을

스타트업 채용공고를 읽다 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복지를 자랑하는 곳이 많다. #꿈의_직장 #무제한_휴가, #셰프가_요리하는_구내식당 #월세_50만원_지원, #도서비_무한_지원, #자율출퇴근_제도, #최고사양_컴퓨터_제공, #안마의자_구비 등등.


우리 회사는 그런 쪽으로 딱히 내세울 것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직원들끼리 놀러 가면 1인당 2만 원을 지원해주는 '플레이데이', 야근 시 식사비 지원, 주방에 항상 채워져 있는 햇반과 컵라면, 자정 넘으면 택시비 제공 정도? 딱 기본적인 것들만 있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진정한 복지는 따로 있었으니,


대표님 부부는 이전에 창업하신 회사가 크게 성공한 덕분에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지셨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위상이 달라지셨음에도 남자 대표님의 자태는 변함없이 반바지에 쪼리 차림이었다. 투자 받으러 가실 때도, 투자하러 가실 때도 반바지와 쪼리는 마치 전진의 빵모자처럼 대표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그렇게 허례허식이 없어도 너무 없는 남자 대표님은 단연 우리 회사 최고의 복지가 되었다. 대표님의 솔선수범 덕분에 회사는 봄부터 반바지에 쪼리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마 내 살아생전 반바지 입은 남자를 가장 많이 본 시절로 기록될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장 차림인 대기업에서 일하다 이직하신 분들도 하루 만에 대표님표 드레스코드에 적응하게 되었다. 게다가 종종 주방에 누워서 일하는 대표님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그 때문일까? 직원들 역시 대표님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일했다. 그러다 몇 시간씩 잠에 빠져도 대표님은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아무렴 일만 잘하면 된다지만, 막상 돈 주고 남을 고용하게 되는 입장이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는데 대표님은 그런 부분에서 무감각하셨다. 아니 쿨하셨다.


여자 대표님은 다른 쪽으로 자유로우셨다.

실패할 기회를 아낌없이 주는 것

그녀는 늘 직원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시도할 수 있도록 밀어주셨다. 그 시도가 실패로 끝날지라도 직원을 계속 믿고 다음 기회를 주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다. 보통 인내심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언젠가 다 제 몫을 한다.' 예기치 않았던 위기로 구조조정이 필요했던 순간에도 대표님은 자비를 써서라도 남아있는 직원들 모두를 안고 가는 것을 선택하셨다.


퇴사 후 만난 동료 하나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거기 있으면서 좋았던 점이 실패에 대한 압박감이 없었던 거야. 나는 평생 모든 걸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살았거든? 근데 대표님은 내가 회사 설립 사상 가장 큰 실패를 했을 때도 '괜찮아'라고 말하셨어."

돌이켜 보면 대표님 부부의 이러한 성향 덕분에 우리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유를 넘어 방임에 가까운 시스템이었음에도 그때의 우리가 서비스의 성공이 곧 나의 인생인 양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두 가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복지가 너무 없어 정신승리 중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차단하기 위해 리얼 복지에 대해서도 써보겠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와 한의원이 제휴를 맺었다는 공지 메일이 도착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회사 근처 한의원에서 힐링 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최신식 한의원이었던 그곳은 초음파 검사도 하고, 침도 놓고, 산소포화도 검사도 하고, 스트레스 지수도 측정해주는 신기한 곳이었다. 신나게 한의원을 다니던 나는 2주째에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주부터 보였는데 놀라실까 봐 말 안 했는데요. 지금 혹이 두 개 있어요."

그 길로 대학병원에 간 나는 한의원 선생님 진단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의원에서 말한 혹의 센티미터까지 같았다. 골반까지 퍼져서 아주 심각한 상태라 했다. 다행히 나는 빠르게 수술을 했고 무사히 회복할 수 있었다. 회사의 새로운 복지 시스템이 나를 구한 셈이다.

엊그제는 입사한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좋은 날도 있었지만 스타트업답게 참신한 사건들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결국 몸이 고장 났고요. 이번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어제 짐 싸면서 빈 책상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그토록 쉬고 싶었던 회사지만 2주 넘게 못 온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수술 끝나고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데 퇴원해도 회사에 존재하는 문제들은 여전하겠지. 지혜롭고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기를. 그래도 아직은 사랑하는 나의 회사.

- 2016년 2월 6일의 일기

많은 시간이 흐르고 퇴사를 앞둔 나는 일 년 전 병실에 꽃바구니 하나 보내주지 않은 회사에 화가 났다. 복지는 둘째치고 이건 마음의 문제 아니야? 뒤늦게야 곪아 터진 상처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며 말했다. 회사가 나한테 너무했어. 나빴어. 이게 증거야.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떠올린다.

내가 사랑했던 이 회사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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