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23
나는 한때 술을 좋아했다. 키 작은 여자의 몸으로 험난한 방송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주량을 키워야 한다는 그릇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띵한 기분이 들 때면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난 취하지 않는다'를 되뇌었다. 의외로 소질도 있었다. 술 소화력이 좋은지 다음날 숙취도 없었고, 알코올이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 헤헤거리는 타입이라 딱히 나쁜 주사도 없었다. (기분이 과하게 좋은 것이 진상일 수는 있겠다)
사주 아줌마 또한 말씀하셨다.
아가씨는 사주에 불이 많아서 물이 필요해. 술 안 마시면 이 속에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 마셔야 해
그러나 거친 방송국에 입성할 줄 알았던 나는 그간의 음주 트레이닝이 무색하게 아주 조신한 스타트업에 발을 들였다. 멤버 대부분이 술담배를 하지 않았다. 회사가 커지면서 조금씩 음주에 능한 캐릭터들이 투입되긴 했지만 나의 팀은 변함이 없었다. 리더부터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술은 냄새만 맡는 사람이었고, 나머지 팀원들도 특별한 사회적 압박이 없는 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들은 내내 사이다만 마시다 고기가 떨어지면 깔끔하게 헤어지곤 했다. 쓸데없이 주량은 늘려 놨는데 정작 술 마실 일이 사라진 내겐 고역이었다. 주량 쎈 집순이에게 회식은 일생일대의 이벤트이거늘...
"마셔요. 왜 나만 마셔요."
(절레절레)(시로시로)
"그럼 제가 다 마십니다. 진짜!"
바락바락 병나발을 부는 나를 보고도 팀원들은 끝내 함께 술잔을 기울여 주지 않았다. 식전 기도는 하지 않은 게 어딘가 싶다가도 다른 팀들은 한창 2차 갈 시간에 정갈하게 귀가 준비를 하는 우리 팀이 야속했다. 좀 같이 좀 마셔주지. 재미없잖아 엉엉엉.
나의 진상을 묵묵히 감내한 리더는 다음날 팀 회의 시간에 입을 열었다.
"이제 회식은 없어요"
왜요!!!!!!!!!!!!!!!!!!!!!!!!!!!!!!!!!!!!!!!!
초콜릿 금지당한 어린이처럼 절망하는 내게 리더는 유치원 선생님 톤으로 말했다.
술 강요 안 해야 회식 또 할 수 있어요.
어차피 나는 얼마 안 가 건강상의 이유로 더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이제는 나랑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신다고요, 팀원 여러분!!!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술 없는 회식도 적응하니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질펀하게 취하는 대신 오버워치를 하러 가거나 예쁜 맛집을 찾아가곤 했다. 물론 PC방에서 서로에게 오가는 소리는 아기자기하지 않았다. 궁이라도 한 번 잘못 썼다가는 아주 그냥.
그러던 어느 날 월 KPI를 달성한 우리 팀은 오후 근무 시간 내내 놀러 갈 기회가 생겼다.
"제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방탈출 카페 가는 건 어때요?"
리더가 이렇게 운을 뗄 때는 팀원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목적지가 방탈출 카페라고 정해진 것이다. 그래도 나이스 초이스. 우리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다른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출발했다. 평일 오후에 반바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강남 바닥을 활보하는 우리의 행색은 몹시 없어 보였으나 마음만은 의기양양했다. 30분 만에 끝내 버리면 어떡하지? 최고 기록 인증샷 같은 걸 끼얹나?
방탈출 카페에 도착해 소지품을 맡기고 문 앞에서 대기하자 직원이 우리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했다. 그 한 명이 방에 먼저 들어가서 나머지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쭈뼛대자 직원은 그냥 여자분 오라며 나를 끌고 갔다.
"우리 망하는 거 아냐?"
못 미더워하는 팀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안대를 쓴 채 먼저 방에 들어갔다. 인솔해준 직원은 나를 침대 창살에 수갑을 채워서 앉히더니 안대를 풀어 주었다. 곧 팀원들이 줄줄이 끌려 들어와 감옥에 갇혔다. 유일하게 감옥 밖에 있는 내가 그들을 꺼내야 하는 모양이었다. 갇히자마자 새장 속에 있는 아기 새처럼 어찌나 빽빽대던지 나는 팀원들의 등쌀에 방 안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수갑 때문에 침대에서 멀어지기 힘들 땐 그냥 침대까지 끌고 움직였다.
"우리 너무 여자만 힘쓰게 하는 것 같아"
괴력으로 침대를 끌고 있는 나를 보던 동갑내기 팀원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저거 그냥 평생 갇혀있게 할까.
"나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리더는 감옥 철창을 타고 올라가 빠져나오려고 했다. 아니 절대 그런 식으로 탈출이 설계되어 있지 않을 거야. 창피하니까 내려오세요. 단체로 무대포를 부리고 있는 혼돈의 가운데 나는 혹시나 해서 손을 꾸겨보았다.
어? 나 수갑 빠졌어
놀랍게도 수갑이 그냥 빠졌다. 얼떨결에 자유의 몸이 된 나를 팀원들은 더 적극적으로 부려먹기 시작했다.
"저기 시계 뒤에는 봤어요?"
네네. 봤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침대 옮기느라 지친 나는 대충 보고 손을 휘이휘이 저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40분이 넘도록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하자 투입된 직원이 시계 쪽으로 가는 순간 팀원들이 희번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미안. 시계 뒤에 뭐가 있었구나.
"방탈출 처음 해보세요? 가구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저희 나중에 치울 때 힘들어요. 힘써서 문제 푸시는거 아니에요."
처참한 방을 보고 빡침이 몰려온 듯한 직원은 우리가 더 난장판을 만들지 못하도록 단서를 반 이상 다 알려 줘버렸다. 후다닥 말을 마친 직원은 다시 나가려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남자분들 왜 아직도 감옥 안에 계세요? 여자분 수갑 열쇠 찾았으면 그걸로 감옥 문도 따면 되는데?"
아, 제가 수갑을 그냥 뺐습니다. 열쇠 같은 건 못 찾았고요.
수치스러운 직원 찬스가 끝나고 팀원들은 드디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새장을 나온 아기 새들은 양심도 없는지 우리끼리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단서를 많이 알려줬는지 모르겠다고 빽빽댔다.
"직원 부를까? 나 버튼 누른다?"
그러나 호기롭던 아기 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포기하고 다시 직원 찬스를 쓰게 되었다. 굴욕적이야. 애초에 최고 기록 인증샷 따위 이 조합으로는 불가능했다.
시간은 이미 초과했지만 일 년 치 바보짓을 마친 우리는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있었다. 레이저로 어딘가를 쏘면 끝나는 것 같은데 어딜 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출구로 나가는 문이 자꾸 열렸다.
"이거 시간 다 돼서 그냥 나오라고 열리는 건가?"
안돼. 포기할 수 없어. 우리는 열리는 문을 계속 닫으며 사방에 레이저를 쏘는 열정을 보였다.
"나오세요. 문제 다 푸셔서 문 열린 거에요"
이때 인내심이 끊어진 직원이 문을 벌컥 열며 말했다. 아마 여기저기 쏜 곳 중에 정답이 있었나 보다. 답을 맞혀서 자동으로 방문이 열린 건데 그것도 모르고 다 풀 때까지 안 나가겠다고 문을 닫고 버텼으니(쑻)
재밌다. 우리 다음 달에도 또 와요. 이제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스타트업의 회식, 술은 없어도 진상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