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지옥에 온 걸 환영해" 우리들의 미친 여행기

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26

by 지금을

그때 우리는 단체로 여행이 좀 필요했다. 힐링하고픈 이유야 각자 달랐지만 최우선순위는 지지부진한 이별을 앞두고 있던 디자이너(20대, 레고덕후). 마음이 약한 그녀는 차마 헤어지자는 말은 못 하고 시간만 가지던 중이었다. 가까운 춘천이라도 가자. 자전거 타면서 다 잊고 딱 말하는 거야. 오빠 우리 헤어져.


하지만 우리의 잘못은 너무 게으른 나머지 이 중요한 여행의 계획을 제3자에게 모두 맡겼다는 것이다.


문제적 제3자는 우리보다 일주일 먼저 춘천으로 이별 여행을 다녀온 커뮤니티 팀 멤버였다. 춘천여행이 구여친을 잊는 데 효과적이었는지 다녀온 뒤 그의 청승이 부쩍 줄었다. 게다가 그는 평소 맛집이나 예쁜 카페를 많이 알고 있던 힙스터이기도 했다. 해서 우리는 그의 조언을 듣기로 했다.

"춘천역에 도착해서 자전거 좀 타고 놀다가 소양호까지 슬슬 걸어가서 배 타고 청평사에 가서 등산을 하고요. 내려오는 길에 점심 먹고 'Earth 17'라는 카페에서 노시면 돼요.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시면 될 듯"

밥 로스 아저씨처럼 너무도 간단히 여행 코스를 쓱쓱 그린 그는 분명 춘천역에서 소양호까지는 걸어가도 된다고 했다. 확신에 차 있던 그 눈빛. 그때 한 명이라도 이 코스가 하루 만에 실현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려 했더라면 우리의 여행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다음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상봉역에서 만났다. 편한 ITX를 타는 대신 조금 복작대는 경춘선을 선택했는데 그것조차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영어를 많이 알아듣는 구나"
"미국인..좋은 날 영어 고나리 하지 마라..."

덜컹대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투닥투닥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행복이 넘치는 폭풍 전야였다.


막상 춘천역에 도착하니 예상보다 더 배가 고팠다. 만장일치로 우리는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물론 닭갈비 맛집이 어딘지 미리 검색해온 멤버는 있을 리 없었다(쑻)

우린 비록 게으른 짐승들이지만 동물적인 촉을 세워보자.

왠지 맛집은 역세권에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에는 다들 동의했기 때문에 역 바로 앞에 즐비한 닭갈비 집들은 제외했다. 결국 우리는 배고프다고 징징대면서도 춘천 시내를 한참 걸어 닭갈비 골목에 당도했다. 그곳은 또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다.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가게마다 손님도 거의 없었다. 이렇게나 단서 없이 대박집을 선택해야 하다니. 엑싯할 초기 스타트업 고르는 것만큼 복불복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 가게 벽에 붙어있는 연예인 싸인들이 심히 낡고 헤져서 움찔한 것도 잠시였다. 너무 맛있어요 꿀꿀. 닭갈비도 일품이었지만 우리는 막국수를 호로록 호로록 흡입할 때 특히 감탄했다. 냉면 아니면 냉모밀 맛이겠거니 했는데 뜻밖의 신세계였달까. 아마 우리는 닭갈비 집에서 그 날의 운을 모두 끌어다 쓴 모양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우리는 배가 부르니 역 근처에서 자전거를 좀 타고 놀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계획우 자전거 대여점에 들어가고 나서 급 바뀌었다. 춘천역에서 소양호로 가는 버스가 한 시간 뒤에나 도착한다는 주인아저씨의 귀띔 덕분이었다. 아저씨는 대신 지금부터 자전거를 타고 가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것이라 덧붙이셨다. 소양호까지 걸어갈 수 있다더니 자전거를 타고도 한 시간 반이 걸린다? 누구라도 여기서 약간의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물론 그러기엔 우리는 모두 단순한 데다 몹시 들떠 있었다.

"버스 기다렸다가 가는 시간이나 바로 자전거 타고 출발해서 가는 시간이나 비슷하네. 소화도 시킬 겸 자전거 타고 소양호까지 가자! 다 자전거 빌려 빌려"

그리고 즉흥적이지만 꽤 영리한 선택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힘차게 페달을 밟자 청량한 가을 공기가 느껴졌다. 우리가 춘천에 왔구나.


는 무슨 아주 잠깐 좋다 말았다. 얼마 안 가 우리들의 뺨 가을바람 대신 지옥에서 온 듯한 날파리 떼가 덮쳤기 때문이다. 하루살이 신세 그들는 실제로 내일이 없어 그런지 정말 앞뒤를 가릴 줄 몰랐다. 비명을 지르면 입에 들어가고 입을 다물면 눈에 들어가고(환장파티) 게다가 아무리 자전거를 굴려도 소양호는 나올 생각을 했다. 두시간쯤 날파리와 사투를 벌이던 우리는 결국 재충전을 위해 편의점 앞에 멈췄다. 몇몇은 그곳에서 날파리 막음용 손수건을 샀고,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며 화장실도 다녀왔다.

그 와중에 단체 사진은 남겼다. 우리 꼴이 꼭 매드맥스 같지 않냐고 하는 중.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우리를 지옥의 길로 인도한 커뮤니티 팀 멤버에게 전화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어랏 저는 친구 차 타고 다녀가지고 (긁적)"

차를...차를 타고 다녔어?.......지금 우리 차 타고 다닌 애의 코스를 그대로 따르려고 한 거야? 그는 친구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밖에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았단다. 그래서 당연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 줄 알았다고. 미친거 아냐? 우리는 내일 출근 하면 다같이 그를 죽이자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일단 소양호에 빨리 도착해서 이 여행을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 없을 것 같은 돌무더기 길이 나왔다. 위험하게도 옆에는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우리 생사까지 걸고 자전거를 탈 필요가 있을까? 이거 몰카야?

결국 점심 전에 볼 수 있다던 청평사와 소양호는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이러다 해가 저물 지경이었다. 그때 기적처럼 커뮤니티 팀 멤버가 말한 카페 Earth17의 간판이 보였다.

그렇게 소양호고 나발이고 우리는 Earth17을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

힙스터가 추천해준 카페답게 풍경이 예이었다. 편히 누울 곳도 많고 그네도 있고, 악기를 연주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주문한 음료가 비록 30분이 넘어서야 나왔지만 그쯤이야 이미 온갖 고초를 겪은 우리에게 딱히 단점이 되지 못했다.

근데 우리 온 길 그대로 다시 자전거 타고 가야 하는 거지? 실화지?

유일한 단점은 역시 Earth17가 춘천역에서 굉장히 멀다는 것이고, 우리는 고통받은 만큼 또 고통을 받아야 춘천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자면 모두가 자전거를 타고 이 고행을 함께 할 때 혼자 킥보드를 타고 맹렬히 달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소 각종 다이어트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로 스피닝 매니아이기도 했다. 우리 일행 중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이 딱 둘이었는데 내 동기와 그였다. 전생에 원수도 아니고 매일 유치하게 싸우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날따라 그는 쿨하게 2인용 자전거의 뒷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 자전거로도 힘든 그 길을 킥보드를 타고 열심히 쫓았다. 아니 쫓은 것도 아니다. 우리 중 가장 선두에 서서 달렸다. 그것이 얼마나 비범한 일이냐면 보통 사람들은 킥보드를 타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자전거 무리에서 뒤처진다. 하지만 그는 수 시간 지치지 않고 킥보드를 밀어댔다. 과하게 신나 보이던 그의 얼굴은 극한의 고통으로 쾌락 호르몬이 분비된 걸지도 모른다. 무튼 중요한 것은 그가 오랜 시간 헬스장에 퍼부은 돈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번 겪은 고통이라 그런지 돌아오는 길은 조금 수월했다. 그래서였을까? 그새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막국수를 먹겠다며 역 앞에 있는 닭갈비 집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낮에만 해도 역 앞에는 맛집이 없는 이유를 앞다투어 늘어 놓았는데 고된 운동이 우리의 판단력을 흩트렸다. 역시나 역 앞 가게의 막국수는 실망스러운 맛이었다. 심지어 만두에서 죽은 파리도 나왔다. 점입가경으로 주인아저씨는 만두 접시에서 파리 있는 부분만 손으로 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나마 춘천여행에서 행복했던 '먹방'의 추억도 그렇게 오염되어 갔다.


충분히 가지가지 했으니 이대로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더라면, 그래서 '다음날 커뮤니티 팀 멤버의 목을 무사히 졸랐다'가 이 여행기의 끝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석하게도 우리의 고난은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지친 몸을 끌고 지하철을 탄 것도, 중년의 산악회 커플들의 노골적인 스킨십을 감내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이제 다 왔어. 곧 집일 테니까 참을 수 있어. 그러나 두 정거장쯤 지나고 있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유키 어딨어?

유키는 일본팀 신입 직원으로 석 달간 온보딩을 위해 서울 오피스에 와 있었다. 그녀는 길 잃기 전문이라 일전에도 수차례 눈물을 뿌리며 우리와 경찰서에서 재회한 바 있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그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헌데 막판에 방심한 사이 그녀를 또 잃어버린 것이다. 지하철 모든 칸을 뒤져도 유키는 없었다. 우리는 믿기 힘든 현실을 인정하고 김유정역에 전원 하차했다. 밤이라 몹시 추웠다. 하지만 휴대폰도 없는 유키를 넓은 춘천 땅에서 찾을 생각에 마음이 더 추웠다.


일본팀 리더에게는 뭐라 말하지?유키를 진짜 영원히 못 찾으면 어떡하지? 어떤 생각을 해도 아찔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를 위해 김유정 역 직원분이 춘천역으로 차분히 전화를 걸어 주셨다.

"이름은 유키고요. 일본인이라 한국말 하나도 못하는데 유키라고 부르면 쳐다볼 거에요."

이 어설픈 설명에도 춘천역 직원분이 금세 유키를 찾아주셨다. 유키는 천진난만하게 ITX 표를 사고 있었다고 한다. 찾았으니 이제 약속된 칸에서 유키와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 문제는 경춘선이 워낙 띄엄띄엄 와서 유키가 탄 열차가 올 때까지 우리는 무려 한 시간 가량을 김유정 역에서 떨어야 했다는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춤도 춰보고 뛰어도 봤지만 가을밤은 너무도 추웠다. 까만 밤 하늘에 붉게 빛나는 어느 교회의 십자가를 보며 나는 이 시간이 빨리 가도록 기도했다.


결국 다음날 우리 여행의 주목적이었던 디자이너(20대, 레고덕후)는 앓아 누웠다. 육신이 너무 지쳐 정작 별은 지도 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틈만 나면 미친 코스를 짜 준 커뮤니티 팀 멤버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아직도 틈만 나면 이날의 여행 이야기를 한다.


완벽한 게 하나도 없던 그런 날이었는데

억에 참 많이는가 보다.


우리 다시는 이런 바보 같은 여행 못 하겠지?


2015년 10월 25일, 춘천 소양호로 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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