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10
최근 나는 넷플릭스에 푹 빠져있다. 그렇게 재밌다던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도 몰아보기 시작했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은 백인 중산층 여자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옥 생활을 그린 미국 드라마로 여주가 복역 중인 뉴욕 연방 여성 교도소는 재소자의 인종 별로 철저히 파가 나누어져 있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을 주 축으로 서로 쓰는 화장실도 다르고 밥 먹을 때조차 섞이지 않는다. 교도관과 대화할 대표를 뽑을 때도 그룹마다 따로 뽑아서 각 그룹의 이익을 위해 싸우게 한다. 교도소 측도 재소자들을 인종별로 나누어서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눈치였다. 나는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어 실제로도 저렇게 극단적인 분위기인지, 아니면 극적 재미를 위해 과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회사의 미국인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낀 날이 딱 한 번 있다.
그 날 나는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프런치 조 편성을 받았다. 우리 조는 미국에서 3주간 모셔온 컨설턴트와 이탈리아계 미국인 CFO, 미국팀을 리드하는 히스패닉계 미국인, 일본인 마케터, 한국인 개발자 그리고 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나의 금요일 점심이 언어와 문화 장벽으로 빡세야 하다니!!! 모두가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고르기조차 쉽지 않아서 지하철을 타고 코엑스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가장 큰 고난은 영어도 메뉴 선정도 아니었다.
"잘 들어. 나는 반에서 히스패닉의 키가 작은 남자였고 블라블라"
그나마 저 부분이 간단한 영어라서였을까. 언성이 약간 높아져서였을까. 일본인 마케터와 조신하게 엔칠라다를 퍼먹고 있었던 내 귀에 미국팀 리더인 히스패닉계 미국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래. 나는 백인이고 남성이고 키가 크지. 하지만 블라블라"
질세라 미국에서 모셔온 컨설턴트가 반격을 시작했다. 실제로 백인 상류층 집안 출신이라는 그의 외모는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딱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이었다.
일순간 뜨거워진 식탁 분위기에 영어에 서툰 나와 일본인 마케터는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몇 마디씩 들리는 단어들로 추측하건대 '너는 백인이라 이런 혜택을 받았지'와 '백인이지만 나도 고충이 있다고'의 대결 같았다.
"우리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내가 계산할게"
두 사람의 격한 대화는 줄곧 여유롭게 지켜보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CFO의 중재로 끝났다. 보통 우리 회사의 점심시간은 2시까지인데 그 날 우리 조는 3시가 넘어서야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실 미국팀 멤버들은 국적은 같을지라도 얼굴이 제각각이었다. 머리카락이 갈색인 사람, 주황색인 사람, 노란색인 사람, 눈 색깔이 파란 사람, 갈색인 사람, 하얀 피부, 갈색 피부, 까만 피부 다양했다. 하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 번도 "넌 어디 출신이야?" 같은 말을 먼저 물어본 적 없다. 어차피 답은 "응. 난 미국인이야"일 거고 그 뒤에 "아니 그게 아니라 너의 조상님이..."를 세련되게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들이 무엇을 예의라고 생각하는지 무엇을 무례하다고 느끼는지 잘 몰랐고 그에 관해 딱히 매뉴얼이 있거나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라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은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았다. 물론 우리 미국팀은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속 교도소처럼 인종 별로 나뉘지 않고 다 잘 지냈다. 한국인인 내 눈에 그들은 모두 미국에서 유명 대학을 나온 똑똑한 아이들이었고 똑같은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그 날의 점심시간 이후 그들의 세계엔 한국 땅에서 자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차별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뇌세포에 '이것은 그들에게 민감한 주제이니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새겨 넣었다.
처음 이 회사가 생겼을 때 한국인들이 쓰는 특유의 영어가 미국인들이 듣기엔 공격적이라 오해를 불러일으킨 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제는 미국팀이 한국팀의 영어에 꽤 익숙해져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조심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한국인 멤버들은 습관적으로 "피곤해 보인다. 피곤하지? 일 많지?"라는 안부인사를 건네곤 했다. 마치 "밥 먹었어?"가 진짜 밥 먹었는지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걸 그대로 번역해서 미국팀 멤버들을 화장실에서 만날 때마다 "You look so tired"라고 말했다. 그러자 평소 친하던 미국인이 식사 도중에 귀띔해 주었다.
"미국에선 'You look so tired'라는 말을 '너 오늘 얼굴 상태 안 좋다. 못생겨 보인다' 같은 뉘앙스로 써. 물론 우리는 니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한 번도 기분 나쁘지 않았어. 참고로 말해주는 거야"
이후로 나는 'You look so tired'가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재빨리 'Hi'라고 바꾸어 말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같았고, 상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같아서 함께 걷는 그 길이 어려워도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