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싫어졌어" 초보에겐 무거웠던 공황장애 약의 정체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 #9

by 지금을
파도에 휩쓸리듯이 그냥 그렇게 돼.


결혼을 앞둔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어?’ ‘부모님 허락은 어떻게 받았어?’ ‘준비할 때 양가 합의는 잘 되는 편이야?’ 미혼이면서 주워들은 건 많은 내쏟아내는 질문에 파안미소만띄우던 그녀였다.


“해보면 알아. 내가 뭘 애쓰지 않아도 쓸려가는 기분이야. 뭐가 날 끌고 가는 것처럼 척척 진행돼.”


우와 그런 게 결혼의 연이라는 건가 보다. 그새 한 뼘 더 자란 듯한 친구의 말에 나는 감탄했다.


처음 병원에 방문하던 날,

우습게도 나는 이 생각이 났다.


마치 내가 서른두 살의 1월에 반드시 수행하도록 오래 전부터 정해진 운명 같았다. 지인들의 한 마디가 모여 파도가 되고, 나는 그 파도를 타고 어느새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시작이 이렇다 보니 나는 내 병이나 내가 먹는 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아는 건 없지만 일단 병원 문턱은 넘었으니 나도 한 뼘 더 자랐겠지? 하고 괜히 들떠있기나 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막살기 시작한 뒤로 내 정신 건강은 많이 호전된 것처럼 보였다.


“좋네요. 그래도 한 번 증상이 오면 3개월 정도는 약을 먹게 하거든요. 어차피 애나 님은 지금 최저 용량을 먹고 있으니까 4월까지는 먹고 끊는 작업을 하죠. 이렇게 작은 용량이라도 끊는 작업이 필요해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의사 선생님은 매번 타이레놀을 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약을 처방하셨다. 그래서 나는 꼭 감기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약한 감기. 해서 내가 먹는 약의 무게를 몰랐다. 그게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약의 장점이자 단점은 잠이 온다는 것이다. 주로 퇴근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바로 약을 먹는데 얼마 안 가 잠이 쏟아진다. 누가 마취총이라도 쏜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약에 수면제 성분은 없지만 긴장을 완화 시켜 졸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기엔 너무 심하게 잘 자는데요. 다른 의미로 저녁 있는 삶이 사라졌다.


잠탱이가 되었다는 나의 후기에 불면증을 호소하던 지인들이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약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그들은 약 표면에 쓰인 글씨를 유심히 보더니 바로 인터넷에 검색했다. 약을 족히 30번은 털어 넣어놓고 나는 왜 한 번도 검색해볼 생각을 못 했지?


“항우울제. 자살 방지약이라고 하네.”


네? 검색 결과를 읽어주는 지인의 목소리가 내 심장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그런 약을 먹고 있었다고? 아주 작은 저 약이? 나는 예상 밖의 그 단어가 주는 무게에 짓눌렸다. 저게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의 약이었어?


당연히 항우울제 주겠지. 그럼 뭘 먹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놀랐다는 내 말에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러게. 나는 왜 몰랐지? 그리고 왜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지? 나는 다르다고, 나는 별문제가 없다고 상태가 좋아 아주 작은 용량만 처방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방패 삼아 나는 그렇게 내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은 바깥에서 약속이 늦게까지 있는 바람에 약을 자정 지나고 먹은 적이 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도저히 일어나지 못해서 오전 반차를 써야 했다. 잠에 취했는지 몸이 천근만근 침대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항우울제라는 단어의 무게를 차치하고서라도 생업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해 시간이 늦어지면 약을 생략했다. 연휴에는 어차피 집에만 있으니 먹지 않았다. 마감도 없고, 압박받을 일이 없던 날도 굳이 먹지 않았다. ‘약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겠지?’ ‘안 먹고 최대한 버티는 게 좋겠지?’란 대책도 없고 근거도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은 날에는 어김없이 심장이 뛰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서야 검색을 통해 약물 복용을 임의로 중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약 먹는 것조차 참을 줄은 의사 선생님도 모르셨겠지.


“나 이미 너무 띄엄띄엄 먹었는데 어떡하지?”


나는 2년 전 수술을 한 뒤로 재발을 막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는다. 처음 병원에 갈 때만 해도 술을 안 먹는 게 너무나도 당연해서 의사 선생님에게 특별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참지 않고 막살겠다는 범주에 ‘칵테일’과 ‘와인’이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조금씩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칵테일을 여러 잔 마시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술 마시고 약 먹으면 안 되나?”
“안 될 것 같은데.”


그랬다. 항우울제를 먹을 때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강조 또 강조되어 있었다. 부작용은 강한 자살 충동이라며 빳빳하게 밑줄 처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주여. 부디 이것이 인터넷 괴담이게 해주세요.



나는 아직 한 뼘 더 자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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