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안됐다" 나를 무너뜨린 심리상담가의 말 한마디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 #10
몇 년 전 회사 근처에 예쁜 책방이 생겼다. 쌍따봉을 날리는 직장 동료들의 간증에 출근 때마다 호시탐탐 방문을 노렸지만 어째 일에 치여 한번을 못 갔다. 주말에라도 따로 찾아 가보고 싶었지만 쉬는 날이면 넷플릭스 시청 스케줄이 빠듯하게 잡혀 있던 집순이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책방에서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고 싶었는데 이 기회에 가야겠다.’
그리하여 구경은 공짜인 책방을 보러 한 시간에 9만 9천 원인 심리 상담을 예약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나란 인간, 실로 내수활성화의 요정이 아닌가. 그렇게 얼떨결에 나의 심리 상담이 시작되었다.
12월에 공황발작 증세를 보여 현재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상처가 될만한 일은 일 년이 지나서 심적으로는 많이 안정된 편이고, 신체적인 문제는 약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제 생각과 다르게 괜찮지 않은 걸까 봐 걱정이 되어요. 전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요? 저도 모르는 문제가 마음에 쌓여서 나중에 터지는 건 아닐까요?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책방에 도착했다. 사전 질문지에 이것저것 적어서 내고 조금 기다리자 회의실 안에 있는 상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술술 털어놓는 내 속내를 잠자코 듣고 있던 선생님은 한마디 하셨다.
“‘이제 눈물이 나지 않는 걸 보니까 괜찮나 봐요’란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아요. 애나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함축된 말 같아요. 이 사람은 정말 많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생각하고, 잘살아 보려고 억누르고 애썼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열심히 잘 살다가도 방바닥에 누워서 혼자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얘기라도 할라치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에게 털어놓는 그 순간, 나는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저 이제 괜찮은 거 아닌가요?
“애나가 자신의 마음에 대해 표현하는 걸 보면요. 비유가 너무 적절해서 얼마나 이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알려고 고민을 많이 했는지 알겠어요. 뇌와 몸이 꼭 따로 노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죠? 애나는 오뚝이처럼 그동안 넘어져도 벌떡벌떡 일어나며 살았던 것 같아요. 쾅 하고 부딪힌 오뚝이에게 뇌가 ‘괜찮지? 괜찮아’라고 계속 말한 거예요. 근데 실제로 부딪혀서 충격을 흡수한 몸은 괜찮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몸이 아픈 거예요. 피디 최종 면접 때 자기도 모르게 계속 울었다고 했죠? 저는 간절해서 눈물이 났던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간절하면 더 울지 않았겠죠. 애나는 그 자리에 가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으며 고단하게 살았는지 생각나서 눈물이 났던 게 아닐까요?”
그렇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나는 빠르게 다시 일어났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늘 오뚝이 같다고 했다. 좌절할 만한 일들이 너무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좌절하면 나는 보통 사람들의 속도와 수준에 맞춰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피디가 될 수 있다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결국 일어났으면 됐다. 일어나서 다시 달릴 수 있다면 괜찮다.
“지금 저희가 상담을 시작한 지 50분 정도 지났는데요. 혹시 본인이 계속 괜찮다는 말만 하고 있다는 거 아시나요? 제가 요리조리 질문을 해봐도 애나는 촘촘히 방어벽을 세우고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상담 선생님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참 안됐다.
“애나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살 거예요. 그런데 이대로라면 힘들게 잘 살 거 같아요. 그래서 안됐어요. 지금 오뚝이 안에 쌓인 이야기가 많아서 오뚝이가 너무 무거워져 있어요.”
나는 그제야 눈물이 펑펑 터졌다. 나는 운이 좋으면서도 나빴다.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많이 겪었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내내 돈에 쪼들렸지만 우리 가족은 건강하고, 피디는 되지 못했지만 취업을 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난이었다고 생각했다. 한때 나는 모든 문제집에 ‘강하고 근성 있는 지구인’이라는 문구를 쓰곤 했다. 나는 강해. 작고 유약해 보이지만 강하다.
“사람들은 제가 울보인 줄 알아요. ‘또 울어?’라고 생각하는 게 두려워서 참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도 해요. 나였으면 넌 더 울었을 거야.”
“맞아요. 잘했어. 너무 잘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정말 잘할 거예요. 30년을 이렇게 강하게 잘 버티고 살았는걸. 당연히 더 잘 살 거예요. 그런데 오뚝이가 앞으로도 벌떡벌떡 일어나려면 안이 가벼워야 해요. 이제 그 안에 쌓인 이야기들을 좀 풀었으면 좋겠어요.”
처음 병원을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나의 공황발작은 단순히 작년에 겪은 일뿐만이 아니라 아주 예전의 기억까지 모두 얽히고설킨 결과란 것을. 다만 꼬인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첫 상담이 끝나면 제가 가끔 던지는 질문이 있어요. 지금 애나에게 가장 생각나는 말이 뭘까요?”
…엄마?
알 수 없는 눈물이 내 뺨 위를 데굴데굴 흘렀다.
“오늘 애나가 수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엄마란 단어는 한 번도 안 나왔거든요? 그런데 지금 엄마를 떠올렸어요. 어쩌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엄마가 있는 걸 수도 있겠어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 나는 왜 그 순간 엄마밖에 생각나지 않던지. 여행을 가서 다음 주엔 오지 못한다는 말에 선생님은 숙제를 내주셨다.
“여행 중에 여유가 생기면 오뚝이 그림을 그려보세요.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중에 어떤 이야기를 다음 시간에 나누고 싶은지 생각해보세요.”
+ 안녕하세요, 앵그리애나입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 출간 기념으로 시작한 일요 매거진 연재는 오늘로서 끝이 났습니다. 첫 상담이 끝날무렵 '엄마'라는 대답을 할 때만 해도 앞으로 상담 중에 가족 이야기를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브런치에서 절반 정도의 분량을 연재 뒤 출판사와 신나게 계약을 할 때만 해도 책에 이런 이야기를 담게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우연히 다시 시작된 상담 치료 중에 저는 오랜 시간 외면했던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렇게 첫 기획과 많이 달라진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가 완성되었습니다. 연재 매거진은 총 10화 분량이라 이야기를 모두 담지 못해 아쉽지만! 벌써 끝나다니 섭섭하지만! 뒷 이야기는 서점 또는 e북, 오디오북으로 만나보실 수 있답니다. (자낳괴의 기승전 홍보)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정말로ㅠ-ㅠ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