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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Nov 21. 2021

우리 하루의 끝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 당신과의 시간들.

그땐 알지 못했다. 답답했던 고등학생 시절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지방의 사립 인문계고는 야간 자율학습에 필사적이었다. 예체능을 전공하는 소수를 뺀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저녁식사 후 자습실에 자리를 잡았다. 네모난 자습실은 짙은 회색의 교복과 하늘색 체육복 색깔로 빼곡히 채워졌다. 나 역시 그 속에 속한 하늘빛 블럭 하나였다. 가장 자신 없는 수학 공부에 골머리를 앓고, 언어영역 중 재미있는 문학작품이 나오면 일부러 오래오래 글을 읽었다. 하루에 정해진 분량의 영단어를 외우고, 모의고사 문제지를 풀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부과한 하루치 공부 목록은 언제나 길었고, 그날 다 마치지 못한 분량은 다음날로, 그다음 날로 미루며 매일을 보냈다.


열 시 오십오 분,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기 5분 전쯤이면 여기저기서 조심스러운 부스럭거림이 시작된다.


열한 시 땡,


선생님이 나가시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미리 챙겨둔 짐을 챙겨, 혹은 그때 부리나케 가방을 싸 자습실 밖으로 향했다. 내겐 청개구리처럼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썰물처럼 아이들이 빠지고 나가면, 10분 정도 자리에 남아 공부를 더하고 나오는 것이다. 정규 자습시간에 그만큼 더 집중을 해서 공부를 하면 될 것을, 그제서야 괜히 더 열심히 공부하는 척 자리를 지켰다.


열한 시 십분,


드디어 나도 자습실 문을 나선다. 치마를 펄럭이며 회색 콘크리트 계단을 슬렁슬렁 내려와 건물 1층의 큰 거울 옆 유리문을 나서면 상쾌한 밤공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과 자습실 속 가득 찬 아이들의 체취, 온갖 소음에서 벗어나는  순간 느껴지는 상쾌한 해방감. 그 몽글한 자유를 만끽하며 주차장으로 나서면 텅 빈 주차장 한켠에 세워진 아빠의 차가 보였다.


작은 전기공사 업체를 운영하시는 아빠는 낮에는 제주도 곳곳을 돌며 현장 일을 보고, 밤에는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에서 회계와 문서 작업을 하며 치열하게 사셨다. 나의 고등학교 입학 이후 아빠에게는 10시 50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퇴근시간이 되었다. 보던 서류를 급히 정리하고 나를 마중하러 차로 달려가 시동을 걸어야 할 타이밍. 아빠는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데리러 왔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20분 남짓이니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건만 아빠에겐 그 김기사 역할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였다.


아빠는 언제나 열한 시 이전에 도착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한참 늦는 딸을 기다렸다. 오늘도 딸은 마찬가지로 늦게 나올 거란 걸 알면서도, 아빠는 늦는 법이 없었다. 왜 너만 항상 이리 늦나며 이유를 묻거나 타박을 하는 법도 없었다. 차에 타는 딸의 기분을 살피며 언제나처럼 말없이  다시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끝없이 재잘댔다. 성적이 잘 나오거나 선생님께 칭찬을 들은 날이면 MSG를 듬뿍 뿌려 자랑했다. 아빠는 무심한 척 별 리액션을 안 했지만 피어오르는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성적이 잘 안 나오거나 친구에게 서운한 일이 있는 날이면 내 말수가 평소의 반절로 줄었다. 그런 날이면 아빠가 맥락 없는 썰렁한 농담들을 건네어 아빠의 투박한 방식으로 나를 위로했다.


술을 좋아하는 아빠는 가끔 취한 상태로 걸어서 마중을 왔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싫었다. 술을 과하게 좋아하는 아빠가 술을 마시는 자체가 싫었고, 취한 상태로 학교로 오는 게 부끄러웠다. 어차피 운전도 못해 걸어서 집에 가야 하는데 왜 굳이 데리러 오는 건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화를 냈고, 아빠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낸 후 멀찍이 떨어진 채로 집을 향해 걷기도 했다. 평소에 말수가 없는 아빠는 술이 들어가면 그나마 말수가 늘었다. 자꾸 건네는 이상한 말들에 나도 모르게 대꾸하다 보면 결국 집에 도착할 때 즈음엔  마음이 풀려있었다.


<어바웃 타임>에서 팀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 아버지는 시간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어린 팀과의 바닷가 산책을 택했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 아빠와 나도 이별을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나에게 시간여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고등학생 시절 그 소소한 하루의 끝으로 향하고 싶다. 술에 취한 아빠가 주차장 구석에 서서 하늘의 별을 보고 있으면,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아빠를 꼭 끌어안은 뒤 같이 별을 잠깐 본다. 다음엔 아빠와 손을 꼭 잡고 아주아주 천천히 집을 향해 걷는다. 내 이야기를 하느라 귀한 시간을 다 쓰지 않고, 아빠의 하루는 어땠는지도 물어본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


지루한 일상이라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참 반짝거린 시간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쑥스러워 절대 말하지 못할 것만 같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말씀드려야겠다. 고등학생 시절, 아빠 덕에 매일매일의 끝이 참 포근했다고. 나도 아빠의 고단한 하루 일과  끝에 기분 좋은 마침표가 될 수 있어 참 기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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