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3편 조선 (2-1) #19

아사달阿斯達은 어디인가? (3/5)

by 잡동산이

영지와 도하가 각각 있던 곳에 만들어진 영지-현과 도하-현을, 광무-제에 의해 다시 재건되기에 앞서의 한漢 곧 전-한[前-漢]의 땅에 대해 적은 한서 지리지는 유-주 요서-군의 현들[V-1:⑨, ⑮]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한 곧 후-한[後-漢]의 땅에 대해 적은 후한서 군국지는 영지-현은 요서-군의 성[W-1:⑦], 도하-현은 요동-속국의 성[W-2:⑯]으로 적었습니다.


V-1 한서 지리지: ① 요서-군[遼西-郡]은 ... ② 호戶는 72,654이고, ③ 구口는 352,325이고, ④ 현縣은 14이다: ⑤ 차려(-현)[且慮] ..., ⑥ 해양(-현)[海陽] ..., ⑦ 신안평(-현)[新安平] ..., ⑧ 유-성(-현)[柳-城] ..., ⑨ 영지(-현)[令支] ..., ⑩ 비여(-현)[肥如] ..., ⑪ 빈종(-현)[賓從] ..., ⑫ 교려(-현)[交黎] ..., ⑬ 양락(-현)[陽樂], ⑭ 호소(-현)[狐蘇] ..., ⑮ 도하(-현)[徒河] ..., ⑯ 문성(-현)[文成] ..., ⑰ 임유(-현)[臨渝] ..., ⑱ 수(-현)[絫] ①遼西郡...②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③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④縣十四⑤且慮...⑥海陽...⑦新安平...⑧柳城...⑨令支...⑩肥如...⑪賓從...⑫交黎...⑬陽樂⑭狐蘇...⑮徒河...⑯文成...⑰臨渝...⑱絫
W-1 후한서 군국지: ① 요서-군[遼西-郡]은 ... ② 5(개) 성들[城]이고(=성들을 거느렸고) ③ 호戶가 14,154이고, ④ 구口가 11,714다: ⑤ 양락(-성)[陽樂], ⑥ 해양(-성)[海陽], ⑦ 영지-성[令支] - ⑧ 고죽-성[孤竹-城]이 있었다. - ⑨ 비여(-성)[肥如], ⑩ 임유(-성)[臨渝]. ①遼西郡...②五城③戶萬四千一百五十④口八萬一千七百一十四●⑤陽樂⑥海陽⑦令支⑧有孤竹城⑨肥如⑩臨渝
W-2 후한서 군국지: ① 요동-속국[遼東-屬國] - ② 옛날 ③ 감향(-현)[邯鄕]이었는데 ● (감향-현에는) ④ 서-부-도위[西-部-都尉]가 있었다. ● (서-부-도위는) ⑤ 안-제[安-帝] 때에 ⑥ 속국-도위[屬國-都尉]라고 하고 ● 따로 ⑦ 6(개) 성들[城]을 거느리도록 하였다. - 은 ⑧ 낙-양[雒-陽]의 동북쪽 3,626리에 있다: ⑨ 창료(-성)[昌遼] - ⑩ 옛날 ⑪ 천료(-현)[天遼]이었는데 ● (천료-현은) ⑫ 요서(-군)[遼西]을 따랐다. - , ⑬ 빈도(-성)[賓徒] - ⑭ 옛날 ● (빈도-현이었는데 빈도-현은) ⑮ 요서(-군)을 따랐다. - , ⑯ 도하(-성)[徒河] - ⑰ 옛날 ● (도하-현이었는데 도하-현은) ⑱ 요서(-군)을 따랐다. - , ⑲ 무려(-성)[無慮] - ⑳ 의무려-산[醫無慮-山]이 있다. - , ㉑ 험독(-성)[險瀆], ㉒ 방(-성)[房]. ①遼東屬國②故③邯鄕●④西部都尉●⑤安帝時⑥以爲屬國都尉●別⑦領六城⑧雒陽東北三千二百六十里⑨昌遼⑩故⑪天遼●⑫屬遼西⑬賓徒⑭故●⑮屬遼西⑯徒河⑰故●⑱屬遼西⑲無慮⑳有醫無慮山㉑險瀆㉒房


그런데 후한서 군국지가 요동-속국에 있다고 적은 6개의 성들 가운데, 3개 성들은 한서 지리지가 요동-군의 현들로 적었던 성들이고 도하-현을 포함하는 나머지 3개 성들은 한서 지리지가 요서-군의 현들로 적은 것들입니다. 그러니 도하-현은 전-한 때에 요서-군 현들 가운데 동쪽에 자리잡고 있던 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V-2 한서 지리지: ① 요동-군[遼東-郡]은 ... ② 호戶가 55,972이고, ③ 구口가 272,539이고, ④ 현縣이 18이다: ⑤ 양평(-현)[襄平] ..., ⑥ 신창(-현)[新昌], ⑦ 무려(-현)[無慮] ..., ⑧ 망평(-현)[望平] ..., ⑨ 방(-현)[房], ⑩ 후-성(-현)[候-城] ..., ⑪ 요수(-현)[遼隊]... , ⑫ 요양(-현)[遼陽]... , ⑬ 험독(-현)[險瀆], ⑭ 거취(-현)[居就]... , ⑮ 고현(-현)[高顯], ⑯ 안시(-현)[安市], ⑰ 무차(-현)[武次]... , ⑱ 평곽(-현)[平郭]... , ⑲ 서안평(-현)[西安平] ..., ⑳ 문(-현)[文] ..., ㉑ 번한(-현)[番汗] ..., ㉒ 답씨(-현)[沓氏] ①遼東郡...②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③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④縣十八⑤襄平...⑥新昌⑦無慮...⑧望平...⑨房⑩候城...⑪遼隊...⑫遼陽...⑬險瀆⑭居就...⑮高顯⑯安市⑰武次...⑱平郭...⑲西安平...⑳文...㉑番汗...㉒沓氏


앞서 왕검의 아버지 웅이 내려온 단, 그곳이 있던 태백-산은 압록-수에서 나오는데, 압록-수는 곧 마자-수이며 염난-수와 더하여져서 요동-군 서안평-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왕검이 도읍하였던, 태백-산 가까이 있던 평양에서 옮겨 다시 도읍한 아사달은 요서-군보다 요동-군에 가까웠, 따라서 영지-현보다는 도하-현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아사달에 이르렀던 발 사람들은 도하-현에서 이르렀던 것이고, 아사달은 요동-군 안에서는 서쪽, 도하-현의 사람들이 달아나 쉽게 이를 수 있는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사달은, 전-한 때의 요동-군의 서쪽 부분에 있던 현들, 후-한 때의 요동-속국 있던 3개 현들에 가까운 이었습니다.




그러한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사기색은의 사기 조선열전의 왕험王險이라는 구절에 대한 주석 그 단서가 주어져 있습니다. 아래에 그 내용을 제시하였습니다. 비슷한 구절이 한서 지리지 주석에도 있는데, 일단 아래 자료를 살펴보고 나서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X-1 사기색은: (왕험에 대해) ① 위소가 ● 이르기를 "● (왕험은) ② 옛 읍의 이름이다."라고 하였으며, ③ 서광이 ● 말하기를 "④ 창려에 ⑤ 험독-현이 있다. ⑥ 응소가 ⑦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에 주석하기를 '● (험독-현은) ⑧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라고 하였는데 ⑨ 신찬이 ● 이르기를 '● (조선-왕의 옛 도읍은) ⑩ (왕)험-성이다. ● (왕험-성은) ⑪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①韋昭●云●②古邑名③徐廣●曰④昌黎⑤有險瀆縣⑥應劭⑦注地理志遼東險瀆縣●⑧朝鮮王舊都⑨臣瓚●云●⑩險城●⑪在樂浪郡浿水之東也


위의 주석은 시간 순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구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한 말에 일어난 오의 사람 위소의 말을 인용하고, 다음으로 동-진 때의 사람 서광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뒤에 나오는 것은 후-한 때의 사람 응소의 말데, 석은 시간 순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니 응소의 말을 인용한 것은 주석이 아니라 서광입니다. 그 뒤 서-진 때의 사람 신찬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살펴보면, 위소와 서광의 말은 모두 왕험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입니다. 위소는 왕험은 옛 읍의 이름이다[X-1:①-②]라고 하였,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X-1:③-⑤]고 말하어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에 주석하여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X-1:⑥-⑧]라고 였고 신찬은 험-성이 낙랑-군의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X-1:⑨-⑪]라고 였다고 말하습니다.


다시 살펴보면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에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주석하였는데, 신찬은 응소가 한서집해에 적은 주석에 소리, 뜻을 보태어 한서집해음의를 지은 사람니 그의 첫 구절은 주석에 적은 지막 구절, 조선-왕의 옛 도읍이 왕험-성이고 한 것입니다. 곧 신찬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 왕험-성이며 낙랑-군의 패-수 동쪽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왜 서광은 이러한 말들을 인용하였을까요? 서광은 요동-군도 낙랑-군도 아닌 창려-군의 험독-현 왕험라고 하였는데, 응소가 주석한 대로 왕험이 조선-왕의 옛 도읍이고 요동-군의 험독-현에 있다면 창려-군의 험독-현은 왕험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찬이 말한 것처럼 왕험이 응소가 주석한 요동-군 험독-현 뿐만 아니라 낙랑-군에도 있었다면 왕험은 다른 곳 - 창려에도 있을 수 있지요. 때문에 서광은 응소의 주석과 더불어 신찬의 말을 함께 인용한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들의 말 가운데 잘못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면 바로 아사달에 이릅니다. 한 걸음만 더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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