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3편 조선 (2-1) #20

아사달阿斯達은 어디인가? (4/5)

by 잡동산이

이 사람들의 말 가운데 잘못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내기 위하여, 4편에서 핵심 문자 자료로 살펴볼 자료를 먼저 간단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그 자료란 바로 사기 조선열전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은 조선-왕 만이라는 사람[Y:①]을 적고, 또한 만이 동쪽으로 가서 달아나 새塞를 나가고 패-수를 건넜고[Y:㉗-㉙], 왕험에 도읍하였다[Y:㉝]고 적었습니다. 그러니 패-수 동쪽에 왕험-성 곧 조선-왕의 도읍이 있었다는 신찬의 말은 옳습니다.


Y 사기 조선열전: ① 조선-왕[朝鮮-王]이었던 만滿이라는 이는 ② 옛[故] 연燕 사람이었다. ● (연 사람들은) ③ 처음 연燕을 온전히 하였을 때부터 ● (연이) ④ 일찌기 ⑤ 진-번[眞-番]을 차지하고[略] 조선朝鮮을(= 조선이 연을) 따르도록 하여[屬] ⑥ (진-번, 조선에) 관리들[吏]을 두도록[置] 하니 ● (관리들이) ⑦ 장들[鄣], 새들[塞]을 쌓았다. ⑧ 진秦이 ⑨ 연을 없애고서 ⑩ (연의) 요동(-군)[遼東] 바깥의 요들[徼]을(= 장들, 새들이 진을) 따르도록 하였다. ⑪ 한漢이 ⑫ 일어나서 ⑬ 그 곳[其](= 진의 장들, 새들)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였다. ● 다시 ⑭ 요동(-군)의 옛 새들[塞]을 고쳐 ⑮ (한의 새들에서) 패-수[浿-水]에 이르기까지를(= 패-수까지 이르는 땅을) ⑯ 계界로 하여 ⑰ (계가 있는) 연을(=연이 한을) 따르도록 하였다. ⑱ 연의 왕王 노관盧綰이 ⑲ 등돌리고 흉노匈奴에 들어가자(=흉노를 따르자), ⑳ (연의 사람) 만滿이 ㉑ 명령받은 곳[命]을 떠나[亡] ㉒ 무리 1,000명[人] 남짓을 모았다. ● (만과 무리가) ㉓ 상투처럼[魋] ㉔ (머리를) 묶고[結] ㉕ 남쪽 변방 사람들처럼[蠻], 동쪽 변방 사람들처럼[夷] ㉖ (옷을) 입고 ㉗ 동쪽으로 가서 ㉘ 달아나 새들[塞]을 나가고 ㉙ 패-수[浿-水]를 건너 ㉚ 진秦이 옛날 (따르도록 하였으나 한이) 비워둔 땅[空地], 상上, 하下의 장들[鄣](=진의 장들이 있는 곳)에 머물렀다. ● (만이) 점점 ㉛ 진-번[眞-番]을 부려[役] 조선朝鮮, 남쪽 변방 사람들[蠻], 동쪽 변방 사람들[夷] 그리고 옛 연燕, 제齊에서 명령받은 곳[命]을 떠났던[亡] 사람들을(=사람들이 만을) 따르도록 하였다[屬]. ㉜ 그 사람들[之]에게 왕 노릇을 하며[王] ㉝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都]. ①朝鮮王滿者②故燕人也●③自始全燕時●④嘗⑤略屬眞番朝鮮⑥爲置吏●⑦筑鄣塞⑧秦⑨滅燕⑩屬遼東外徼⑪漢⑫興⑬爲其遠難守●復⑭修遼東故塞⑮至浿水⑯爲界⑰屬燕⑱燕王盧綰⑲反入匈奴⑳滿㉑亡命㉒聚黨千餘人●㉓魋㉔結㉕蠻夷㉖服㉗而東㉘走出塞㉙渡浿水㉚居秦故空地上下鄣●稍㉛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㉜王之㉝都王險


그러나, 앞서 1편에서 태백-산과 압록-수를 살피며 제시한 한서 지리지 주석은 압록-수 곧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가서 염난-수와 더하여지고 그 물줄기가 서남쪽으로 가서 다시 서안평-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1장 1편 M:①-⑥]고 적었습니다. 마지막 구절의 서안평-현은 한서 지리지가 요동-군의 현로 적은 서안평-현[V-2:⑲]이니, 태백-산 가까이 자리하고 있던 평양 곧 왕험은 서안평-현보다 동쪽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1장 1편 M 한서 지리지 주석: <(서개마-현에는) ① 마자-수[馬訾-水]가 있었다. ● (마자-수는) ② 서북쪽으로 가고, ③ 염난-수[鹽難-水]에 들어갔다. ● (마자-수와 더하여진 염난-수는) ④ 서남쪽으로 가고, ⑤ 서안평(-현)[西安平]에 이르고 ● (서안평-현에서) ⑥ 바다로 들어갔다. ● (마자-수, 마자-수와 더하여진 염난-수는 바다로 들어가기까지) ⑦ 군들[郡] 2(개)를(=현토-군, 요동-군을) 지나며 ⑧ 2,100리를 갔다.> (西蓋馬)<①馬訾水●②西北③入鹽難水●④西南⑤至西安平●⑥入海⑦過郡二⑧行二千一百里>


그러나, 서안평-현의 이름 서안평은 뒤에 요동-속국이 거느리는 성들의 이름으로 보이지 않으니, 요동-속국을 따르는 현들 - 요동-군의 서쪽 부분에 있었던, 험독-현을 포함한 3개 현들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서안평-현은 험독-현보다 동쪽에 있었으며, 따라서 서안평-현보다도 동쪽에 있던 왕험 험독-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응소가 주석한 조선-왕의 옛 도읍은 요동-군 험독-현에 있었만, 신찬이 이야기한 조선-왕의 옛 도읍 왕험-성은 응소가 주석한 조선-왕의 옛 도읍과는 다른 곳입니다. 따라서 왕험은 서광이 신찬의 말을 인용하여 보이려 하였던 것처럼 요동-군, 낙랑-군에 - 여러 곳에 있는 땅 이름이었던 것이 아니니, 서광이 말한 창려의 험독-현도 왕험이 있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찬의 왕험-성은 조선-왕 만의 도읍이고, 응소가 주석한 조선-왕의 옛 도읍이 왕험이 아니라면 그곳은 어디일까요? 다시, 만이 조선-왕이 되기에 앞서 있었던 조선-왕 대해 적은 자료 하나를 살펴보도록 하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의 주석이 인용한 위략은 기-자의 후손이던 조선-후[Z:②]가 스스로 일컬어 왕 곧 조선-왕이라고 하였다[Z:⑩-⑪]고 적었습니다.


Z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편 주석 인용 위략: <① 옛날 ② 기-자[箕-子]의 후손[後] 조선-후[朝鮮-侯]가 ● 보니 ③ 주周는 약해지고 ④ 연(-군)[燕]이 ⑤ 스스로 ● 높여 ⑥ (연-)왕王이라고 하고 ● 바라기를, ⑦ 동쪽으로 가서 ⑧ 땅을 차지하였으면, 하였다. ⑨ 조선-후가 ● 또한 ⑩ 스스로 ● 일컬어 ⑪ (조선-)왕이라고 하였다.> <魏略曰①昔②箕子之後朝鮮侯●見③周衰④燕⑤自●尊⑥爲王●欲⑦東⑧略地⑨朝鮮侯●亦⑩自●稱⑪爲王>


1장 2편에서 살폈듯이, 단-군이 떠나고서 기-자가 조선을 맡아 다스리기에 앞서 단-군이 도읍이던 곳은 앞서, 첫 단-군인 왕검이 평양에서 옮겨 도읍하였던 아사달이었습니다. 그 뒤에 조선-후가 되어 아사달에서 다스리던 기-자의 후손이 다시 만보다 앞서 조선-왕이 되었으니, 응소의 주석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고 적은 조선-왕의 옛 도읍은 바로 아사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서 지리지 주석 앞서 응소가 한서집해에 주석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이것은 사기색은 또한 인용하였던 절입니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의 주석은, 신찬이 이야기한 바 보고 만이 도읍하였던 왕험이 곧 응소가 요동-군 험독-현에 주석한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여습니다. 그리하여 옛 도읍[舊都]이라는 단어를 만의 도읍[滿都][AA:②]으로 바로잡아 적었습니다.


AA 한서 지리지 주석: <① 응소가 ● 말하기를 "● (요동-군 험독-현은) ② 조선-왕[朝鮮-王] 만滿의 도읍[都]이었다. ③ 물의 험함[水險]에 기대었으며, ● 그리하여 말하기를 '④ 험독險瀆(=험한 도랑)'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⑤ 신찬이 ● 말하기를 ● (조선-왕 만의 도읍은) ⑥ 왕험-성[王險-城]이었으며, ● (왕험-성은) ⑦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었다. ⑧ 이곳[此](=요동-군 험독-현)은 ⑨ 이 때[是]부터 ⑩ 험독이었다."라고 하였다. ⑪ (안)사고가 ● 말하기를 "⑫ (신)찬의 이야기가 ⑬ 옳다. ⑭ 패浿의 소리는 ⑮ 보대普大의 반절[反]이다."라고 하였다.> (險瀆)<①應劭●曰●②朝鮮王滿都也③依水險●故曰④險瀆⑤臣瓉●曰●⑥王險城●⑦在樂浪郡浿水之東⑧此⑨自是⑩險瀆也⑪師古●曰⑫瓚說⑬是也⑭浿音⑮普大反>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만의 도읍은 왕험은 험독-현이 있던 요동-군의 서쪽 부분보다 동쪽에 있던 서안평-현보다도 더욱 동쪽에 있었으니, 험독-현에 있던 조선-왕의 옛 도읍일 수 없습니다. 응소는 다만 조선-왕 만이 도읍한 왕험에 주석하여, 그 도읍 왕험보다 앞서 도읍하였던 곳 - 옛 도읍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주석이 그 가운데 옛 도읍[舊都]이라는 단어를 만의 도읍[滿都]으로 고친 것이니, 응소와 신찬의 주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안사고가 그 옳고 그름을 가린 잘못을 바로잡지는 않고 오히려 없던 잘못을 새로 더 것입니다. 세간에서는 지금도 이것에 대해 오고가는 말이 많습니다만 사실은 그저 잘못 이해하고서 고쳐 없던 잘못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다만, 한서 지리지의 주석은 사기색은이 인용하여 적지 않은 응소의 주석을 적고 있니 물의 험함에 기대었기에 험독이라고 하였다[AA:③]고 한 구절이 그것니다. 리하여, 험독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전-한 때에 그러한 현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곳은 현재의 요령-성 태안-현 동남쪽 손성자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시점,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던 MC-1780전에는 물가가 동북쪽으로 더욱 들어와 있으니, 물이 가득하던 그곳은 조선의 옛 도읍이 있던 곳일 수 없습니다. -한 때의 험독-현은 보다 앞서 험독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옛 험독의 사람들이 물가가 서남쪽으로 물러면서 옮겨 자리잡은 곳이니, 현재의 요령-성 태안-현 동남쪽 손성자에서 가까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옛 험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까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MC-1780전보다는 늦지만 기원전 17세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 물건들이 발견되고 있는 곳이 가까이에서 확인되니, 바로 현재의 요령-성 신민-시 고대-산 가까이 있는 고대-산-촌입니다. 곧 여기가 바로 아사달이 있던 곳입니다.




아사달에 도읍한 뒤의 조선과 발에 대한 문자 자료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까운 시기 성주에서 이루어진 모임에 대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기원전 7세기 제齊가 북쪽 변방 사람들을 깨트리는 일을 적은 문자 자료가 있고, 그 뒤 기원전 4세기에 연燕이 스스로 왕이라고 하던 시기가 되어서야 해당 시기의 일들을 적은 문자 자료가 점점 많아집니다.


때문에, 아사달에 도읍한 뒤에 기-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기-자가 아사달에서 사람들을 다스리기 시작하고서 서남쪽 땅에 제가 나타나기까지, 다시 서남쪽 땅에 연이 나타나기까지의 일은 문자 자료로는 거의 알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시기, 정확하지는 않지만 물질 문화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행히 물질 문화의 변화로 이어지는 여러 단서들은 이미 나왔으니, 다 주제로 그것을 루기로 하지요. 러기에 앞서 다음 글에서는 시, 앞서 발과 수라는 이름에 대해 그러하였듯,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험독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는지 가볍게 설명하 아사달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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