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4편 조선 (2-2) #14

조선과 연燕, 진秦, 한漢 (4/4)

by 잡동산이

앞서 위만의 움직임을 적은 자료들을 살펴보았고, 이른 바 패-수[沛-水]가 현재의 대령-강 하류, 취-수[溴-水]가 그 동쪽 산줄기 너머 현재의 구룡-강, 패-수[浿-水]가 현재의 청천-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것을 통해 위만과 조선-왕 준의 일을 이야기할 것인데, 위만묘衛滿墓가 있는 곳을 적고 있는다른 자료를 통해 위만이 처음 머물다 나온 새塞 - 그가 명령받았던 곳[命]이지만 떠났던[亡] 장소에 대하여 보다 분명히 하고 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무덤[墓]과 사당[廟]를 적는 한자들은 현재 소리가 모두 '묘'로 같니다. 때문에 소리에 해당하는 한자를 소 확인하지 않는 사람들 쉽게 혼동니다만, 무덤을 이르는 墓는 그 주검을 둔 곳 말하며 사당을 뜻하는 廟는 후손을 비롯하여 를 받드는 사람들이 찾아보는 곳 말합니다.


이 가운데 사당은 그곳에서 받드는 사람이 죽은 곳과 먼 곳에 세워지기도 하고 여 곳에 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있니, 동명-왕 곧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웠다[H-2:①]고 적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01년 05월 기사,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M-1:①]고 적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03년 03월 기사가 그것입니다.


H-2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01년 여름 05월 ① 동명-왕[東明-王]의 사당[廟]을 세웠다. (溫祚王)元年夏五月①立東明王廟
M-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03년 봄 03월 ① 동명-왕[東明-王]의 사당[廟]을 세웠다. (大武神王)三年春三月①立東明王廟


시기로 보면, 백제가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운 것이 고구려가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운 것보다 이릅니다.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명왕은 어려서 자랐던 부여를 두려워하여 스로 낳은 아이들의 성姓을 동명-성왕이 새로 국을 세우고 성으로 삼은 고-씨[高-氏]가 아니라 해-씨[解-氏]라고 하였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01년 05월 기사가 적은 , 온조-왕이 제에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울 때지도 구려에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하던 유리-명왕이 죽고 그 아들 대무-신왕이 선 다음 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02년 01월 기사는 백제 사람들 1,000호 남짓이 와서 따랐다[M-2:①-②]고 적었으니, 곧 온조를 따라 남쪽으로 갔던 무리가 돌아온 것입니다. 일로 말미암아 이 사람들이 하였던 일들 가운데 동명-성왕의 사당을 지은 일이 알려졌고 그리하여 다음해, 뒤늦게나마 대무-신왕이 고구려에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웠던 것입니다.


M-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02년 봄 01월) ① 백제百濟 사람들[民] 1000호戶 남짓이 ② 와서 따랐다[投]. (大武神王二年春正月)①百濟民一千餘戶②來投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7년 04월 기사는 가뭄이 06월에 이르렀고[H-3:①-②] 이어 비가 내려[H-3:③] 패-수와 대-수 사이의 땅이 비어 사람이 없게 되었다[H-3:⑨]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02년 01월의 기사가 적은 바, 보다 앞서 일어난 일 - 백제 사람들이 고구려로 들어간 일[H-3:⑦-⑧ = M-2:①-②]을 적었습니다. 그 일을 적으면서 보다 앞 부분에는 그 사람들이 있던 곳이 한-수의 동쪽에 있던 북-부의 마을 사람들[H-3:④]이라고 적고 사람들이 굶주렸고 땅이 거칠어졌다[H-3:⑤-⑥]고 적었으니, 이것은 떠난 이유를 적은 것입니다.


H-3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37년) 여름 04월 ① 가뭄이 ② 06월에 이르렀으며 ● 이어 ③ 비가 내렸다. ● (앞서) ④ 한-수[漢-水] 동쪽[東]의(=에 있던) 북-부[北-部]의 마을들[落]에서 ● (사람들이) ⑤ 굶주리고 ● (땅이) ⑥ 거칠어지자 ⑦ (그곳을) 떠나 고구려高勾麗로 들어간 이들이 ⑧ 1,000호戶 남짓이었는데, ● (비가 내리자) ⑨ 패(-수)[浿], 대(-수)[帶]의 사이가(=사이의 땅이) ⑩ 비어 머무는 사람이 없었다. (溫祚王三十七年)夏四月①旱②至六月●乃③雨●④漢水東北部落●⑤饑●⑥荒⑦亡入高勾麗者⑧一千餘戶⑨浿帶之間⑩空無居人


이렇게 옛날 일을 사이에 적은 것은 그것이 그 뒤, 6월에 일어난 결과인 패-수와 대-수 사이가 비게 된 일의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4월부터 6월까지는 가뭄이 계속되고 그 뒤 비가 내린 일 때문이지만, 보다 앞서 그 곳의 사람들이 고구려로 떠난 일 때문이기도 하다고 여겨 이렇게 적은 것입니다.




뒤에 살필 이야기를 약간 하였습니다만, 여하튼 위의 삼국사기의 위 기사들은 사당[廟]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여러, 다른 곳들에 만들어질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墓]은 주검을 두는 곳이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여럿이 있을 수 없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머물던 곳, 비롯된[故] 향鄕에 있기를 바랐기에, 무덤 또한 따로 까닭이 있지 않았다면 처음 스스로 자리잡았던 곳에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바램을, 잠부론은 변방 사람들은 본래의 곳을 떠나지 않고 본래의 곳에서 맡은 일을 하다가 죽기를 바란다[N:⑪-⑫]고 적었습니다. 예기 단궁편은 태-공이 영구에 봉하여졌지만[O:①-②], 그의 5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검을 주 - 태-공이 처음 스스로 자리잡았던 곳으로 돌려보내졌고 주에서 장사지내졌다[O:③-⑤]고 적었는데, 이 구절들은 앞서의 바램을 또한 잘 보여주고 있슴니다.


N 잠부론: ① 대代의 말은 ② 북쪽을 바라보고, ③ (대의) 여우는 ④ 죽으며 ⑤ 머리를 언덕에 두니, ⑥ 변방 사람들은 ⑦ 삼가고 머리숙여지만 ● 매우 ⑧ 싫어하는 것은 ⑨ 안[內](= 변방이 아닌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 비록 ⑩ 사람들을 어렵게 함[禍]을 알아도 ● 여전히 바라기를, ⑪ 그 이어온 일을 지키고 ⑫ 그 본래의 곳에서 죽었으면, 한다. ● 참으로, ⑬ 그곳(= 변방)을 떠나고자 하지 않음이 ⑭ 심하다. ①代馬②望北③狐④死⑤首丘⑥邊民⑦謹頓●尤⑧惡⑨內留●雖⑩知禍人●猶願⑪守其緒業⑫死其本處●誠⑬不欲去之⑭極
O 예기 단궁편: ① 태-공[大-公]이 ② 영구營丘에 봉하여졌으니 ③ 그[比 = 此](= 태-공)의 5세世에 이르기까지 ● 모두(=모두의 주검들은) ④ 돌려보내져 ⑤ 주周에서 장사지내졌다[葬]. ①大公②封於營丘③比及五世●皆④反⑤葬於周




사기 조선열전은 조선-왕 만을 연 사람 곧 주 사람이 아니라 변방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니 만이 새를 나가서는 무리를 모은 뒤에 패-수를 건너 조선에 이르러 처음 머무는 것을 허락받은 곳에, 별다른 일이 없다면 만의 무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료들이 적고 있는 바, 위만이 처음 머물던 곳은 그가 명령받았던 곳[命]이지만 떠났던[亡] 새塞입니다. 그러니, 그의 무덤은 그 가까이에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그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그 가까이에 새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글에서 취-수를 현재의 구룡-강이라고 하고서, 구 서쪽 구봉-산에서 도리-산, 운림-산 그리고 다시 어중-산에서 서쪽으로 현재의 대령-강 동쪽 창창-산과 서쪽 검은-산까지의 산줄기가 북쪽으로 넘어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남쪽 땅을 두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구봉-산 아래쪽은 구룡-강이 동쪽에서 장을 넘어온 사람들을 다시 막아주고 있으니, 새들이 있는 땅은 구봉-산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사이사이 사람이 지날 수 있는 곳들입니다.


그러니 위만이 장들이 있는 땅에 머물기 위하여 떠난 새는 그 산줄기의 제일 동쪽인 구봉-산에 있었던 것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하겠습니다. 위만이 떠나 장들이 있는 땅에 이르는 사이 건넌 취-수에 대해 적지 않은 까닭은 취-수가 조선과 한의 계들이 만나는 선을 대신하였기에 요동-군과 뒤에 조선 땅에 두어진 낙랑-군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구봉-산에 대하여 살펴보면 이러한 예상에 들어맞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담은 자료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여지도서는 영조 때, 전국의 읍들[邑]에서 적어 전하던 지들[志]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이 가운데 평안-도 운산-군의 구봉-산에 대한 구절은 이 산에 연 사람 위만의 묘가 있다[P:②]고 적었습니다.


P 여지도서: (구봉-산은) ① (평안-도) (운산-)군郡의 동쪽 20리에 있다. ② 그(=구봉-)산山에 연燕 사람 위만衛滿의 무덤[墓]이 있다. (九峯山)①在郡東二十里②其山③有燕人衛滿墓


여지도서에는 또한 해당하는 읍의 지도가 실려 있으니, 아래 첫번째 지도가 구봉-산과 위만의 무덤에 대한 구절이 적혀있는 운산-군이 있는 읍에 대한 지도입니다. 그 아래 두번째 지도는 취-수가 현재의 구룡-강임을 살피면서 제시한 것인데, 여기에 구봉-산이 또한 나와 있습니다. 다만, 운산-군의 위치가 여지도서가 지어질 때와는 달라졌기에 조금 더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지도서에 실린 평안-도 운산-군 관련 지도


첫번째 지도에서는 운산-군의 읍이 있는 땅의 북쪽과 동쪽을 구룡-강이 두르고 있으니, 그 읍은 두번째 지도에 운산이라고 적혀있는 곳보다 남쪽, 조양-강이 구룡-강에 더하여지는 곳 서남쪽 땅에 해당합니다. 구룡-강이 조양-강과 더하여지는 곳 북쪽의 옥녀-봉에서부터 새들[塞]이 시작되니, 첫번째 지도는 그 북쪽에 이어지는 구봉-산까지를 모두 구봉-산이라고 하였고 위만-묘를 두번째 지도의 옥녀-봉에 가까운 것에 그려놓고 있습니다.



여지도서에 실린 지들의 내용은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새로운 내용을 보탠[新曾]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실려 있지만,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구절들이 있고 위의 구절은 그러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는 뒤에 고구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설명하여야 하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시간의 큰 흐름 뿐만 아니라 공간의 큰 흐름을 모두 살폈습니다. 이제 큰 흐름 가운데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일들까지 더욱 세밀하게 이야기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남은 일들 대부분은 조선-왕 준과 위만 벌인 일들이니, 그들이 바로 다음 글에서부터 다룰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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