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4편 부여夫餘 (1) #10

부여에 대한 자료들 (4/4)

by 잡동산이

이제, 흘승-골-성이라는 이름을 적은 또다른 자료들을 찾아갑시다. 바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구절들과, 앞서 살핀 위서 고구려열전의 구절들 앞의 구절들입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이 인용한 국사 고려본기와 동명왕편 주석들을 함께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두 자료들은 모두 주몽 - 동명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나오는 땅 이름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3명 사람들을 만났다[Q-2:①-③]고 었는데, 위서 고구려열전은 주몽이 보술-수에 이르러 3명의 사람들을 만났다[Z-2:①-③]고 적었습니다.


Q-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주몽이 ② 움직여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③ 3(명) 사람들[人]을 만났는데, ④ 그(=3명 가운데) 1명[人]은 ⑤ 삼베로 된 옷[麻衣]을 입고 있었고 ⑥ 1명은 ⑦ 기운 옷[衲衣]을 입고 있었고 ⑧ 1명은 ⑨ 바닷말 무늬의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 ⑩ 그들[之]과 더불어 ⑪ 모두 ⑫ 졸본-천[卒本-川](= 졸본-주[卒本-州])에 이르렀다. ①朱蒙②行至毛屯谷③遇三人④其一人⑤着麻衣⑥一人⑦着衲衣⑧一人⑨着水藻衣⑩與之⑪俱⑫至卒本川
Z-2 위서 고구려열전: ① 주몽이 ● 이윽고 ②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③ 3(명) 사람들[人]을 만나 보았는데, ④ 그(=3명 가운데) 1명[人]은 ⑤ 삼베로 된 옷[麻衣]을 입고 있었고 ⑥ 1명은 ⑦ 기운 옷[衲衣]을 입고 있었고 ⑧ 1명은 ⑨ 바닷말 무늬의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①朱蒙●遂②至普述水②遇見三人③其一人著麻衣④一人著納衣⑤一人著水藻衣


3명에 대한 설명이 같으니 둘은 같은 장소인데, 하나는 그 골짜기의 이름을 적었고, 다른 하나는 보다 앞서 물줄기가 시작되었던 장소의 이름을 가진 물줄기의 이름을 적어 달리 보입니다. 결합해보면 동명은 물줄기가 드러나기 시작하던 보술이라는 곳을 지나 그 물줄기가 드러나 흐르는 골짜기인 모둔이라는 곳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이름들이 어디인지는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에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동명이 이러한 장소들을 지나서 3명 사람들을 만난 뒤에, 졸본-천에 이르렀다[Q-2:⑫]고 적었습니다. 삼국유사 기이편은 국사 고려본기를 인용하여 주몽 - 동명 - 이 졸본-주[卒本-州]에 이르렀다[S-2:①]고 적었는데, 글자 모양을 보면 주州는 본래 물줄기가 갈라져 흐르는 땅을 이른 것이니 곧 졸본-천 물가의 땅[州]을 일러 졸본-주라고 적은 것입니다.


S-2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국사 고려본기: ① 졸본-주[卒本-州](=졸본-천의 물가)에 이르렀다. ①至卒本州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졸본-천이라고 적었고 삼국유사 기이편이 국사 고려본기를 인용하여 졸본-주라는 이름으로 적은 장소에 대해 위서 고구려열전이 달리 적은 이름을 이미 앞서 살핀 바 있니 그것이 바로 흘승-골-성[紇升骨-城]입니다. 중요한 구절이기에 앞의 글에서 다시 아래에 옮겨 놓았습니다.


Y-1 위서 고구려열전: (3명[人]이) ① 주몽朱蒙과 더불어 ②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으며, (주몽이) ● 이윽고 ③ 머물러서는 ④ 호號를 ● 말하기를 ⑤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다. ①與朱蒙②至紇升骨城●遂③居焉④號●⑤曰高句麗


이 이름을 앞서 삼국유사 기이편이 인용한 옛 기록은 글자를 달리하여 흘-승골-성[訖-升骨-城][Y-1:④]이라고 적었으니, 흘紇은 본래 그곳에 대한 야기를 적은 가운데에 나오는 일을 적은 흘訖을 뜻이 아니라 소리가 같은 다른 글자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뜻은 엇이었을까요?




앞서 광개토-왕 훈적-비는 동명-성왕의 마지막을 적으면서 그가 천天이 보낸 황-룡[AA-2:②-③], 그 목[頁]에 나아가, 천에 올랐다[昇][AA-2:⑪]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설문해자는 승昇이 본래 해[日]가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M-2:①-②]라고 적고 또한 옛날에는 일日을 빼고 다만 승升이라고 썼다[M-2:⑤-⑥]고 적었으니, 승昇은 곧 승升을 적은 것입니다.


M-2 설문해자: ① 승昇은 ② 해[日]가 올라가는 것[上]이다. ③ 일日을 따르며, ④ 승升이 소리[聲]다. ⑤ 옛날에는[古] ● 다만[只] ⑥ 승升을 썼다(= 승이라고 적었다.) ①日②上也③从日④升聲⑤古●只⑥用升


광개토-왕 훈적-비는 또한 동명-성왕이 천에 오르기[升] 위해 홀본 - 졸본-천 - 의 동쪽으로 가서 언덕에서 황-룡의 목에 나아갔다[AA-2:⑥-]고 적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7년 01월 기사는 황-룡을 또한 국의 이름[Q-3:⑤]으로 적고 있으니 황-룡은 그 가까이 있던 무리를 이르는 것이며, 그 국에 이르는 길목을 일러 그리 적은 것입니다.


Q-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7년 봄 01월 ① 왕태자 해명解明이 ② 옛 도읍[古都]에 있었다. ● (해명은) ③ (강한) 힘을 가졌고 ④ 사나움[勇]을 좋아하였는데 ⑤ 황-룡-국[黃-龍-國]의 왕王이 ⑥ 그것[之](= 해명이 강한 힘을 가지고 사나움을 좋아함)을 듣고 ⑦ 사신을 보내니 ● (사신이) ⑧ 강한 활을 (해명에게) 주는 물건[贈]으로 하도록 하였다.(琉璃明王)二十七年春正月①王太子解明②在古都●③有力④而好勇⑤黃龍國王⑥聞之⑦遣使●⑧以强弓爲贈


그런데 이 기사에는 또다른 중요한 정보가 있으니 바로 옛 도읍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담고 있니다. 다 앞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2년 10월 기사는 유리-명왕이 동명-성왕의 도읍에서 옮겨 도읍하였다[Q-4:①-②]고 적었으니, 해명이 머무르던 옛 도읍이란 동명-성왕의 도읍을 말하며 그곳은 또한 황-룡이라는 무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Q-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2년 겨울 10월 ① 왕이 ② 옮겨 국내國內에 도읍하였다. ③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琉璃明王)二十二年冬十月①王②遷都於國內③築尉那巖城


그러니, 동명-성왕은 황-룡 그리고 황-룡을 보낸 천과 가까이 있는 졸본-천의 동쪽 언덕 또는 그곳과 가까운 곳에 도읍하였으며 뒤에 그곳에서 황-룡으로 가는 길목으로 나아가 천에 올랐습니다[昇/升]. 여기서 올랐다는 글자는 왕의 죽음[昇遐]도 쓰이니 마지막의 구절은 또한 동명-성왕이 천에서 죽은 일을 뜻합니다.


그리하였기에 그 죽음에 대해 고구려에는 자세한 사정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 뒤에 왕태자가 남은 채찍을 장사지내도록 하였다[R-3:⑦-⑨]고 적은 동명왕편 주석의 구절 이것을 보여주 있습니다. 이렇게 동명이 왕 노릇을 그만두고[訖] 천에 올랐던 일을 적은 것이 앞서 흘승訖升이라는 표현이니, 흘은 그만둔다는 뜻을 소리로 가진 글자를 써서 적은 것입니다.


R-3 동명왕편 주석: <가을 09월 ① 왕이 ② 천天에 올라 ③ 내려오지 않았다. ④ (이) 때 ⑤ 나이가 ⑥ 40이었다. ⑦ (왕)태자太子가 ⑧ 남은 바 옥玉으로 만든 채찍[鞭]을 ⑨ 용-산[龍-山]에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秋九月①王②升天③不下④時⑤年⑥四十⑦太子⑧以所遺玉鞭⑨葬於龍山>




그런데 위의 구절들 뒤에는 이어 그 장사지낸 곳을 용-산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흘승-골-성이라는 장소와 황-룡이라는 이름의 무리가 가까이 있었음을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해모수가 흘승-골-성에 이르를 때에는 웅심-산에 멈추었다고 적었으니, 곧 용-산은 웅심-산과 마찬가지로 흘승-골-성에 이르는 그러나 다른 길목에 있던 산입니다.


요컨대 흘승-골-성은 졸본-천의 동쪽 언덕 또한 천에 가까이 있었던 동명의 도읍니다. 그러니 여기는 앞서 광개토-왕 훈적-비가 도읍하였다고 적었던 곳, 졸본-천의 서쪽에 있는 산 위에 성을 쌓고서 도읍하였던 곳과는 다른 곳입니다.




이곳을 종종 졸본과 혼동하는 것은, 홀본을 중심으로 한 구절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읍한 일이 분명하게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명-성왕은 언제 여기에 도읍하였던 것일까요?


여기에 관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구절을 다시 살펴봅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비류-수 물가에 머물 곳을 엮었다[Q-5:③]고 적었는데 그 앞에 주몽이 도읍하고자 하였으나[Q-5:①], 궁, 실을 만들지는 않았다[Q-5:②]고 적었습니다.


Q-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몽은) 이윽고 ① 도읍하고자[都] 하였으나, ② 서둘러 궁宮, 실室을 만들지 않았다. ● 다만 ③ 비류-수[沸流-水] 위에 머물 곳[廬]을 엮었다. 遂①欲都焉②而未遑作宮室●但③結廬於沸流水上


이 비류-수라는 곳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현재의 혼-강과 더하여진 뒤 아직 현재의 충만-강과 더하여지지 않은 현재의 압록-강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그곳을 혼-강의 부분 가운데에서 찾아보게 됩니다. 게다가 이어 졸본에 이르러 도읍하였다고 하는 구절이 나오기에 여기를 졸본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일을 적으며, 삼국유사 기이편은 국사 고려본기를 인용하여 주몽이 이윽고 도읍하였다[S-1:①]고 적었습니다. 곧 이 때에 동명-성왕은 비류-수 물가의 흘승-골-성이 있던 곳에 도읍하였고, 다만 궁, 실을 만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곧 졸본-천의 동쪽에 먼저 도읍하고 졸본-천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그곳의 부여 사람들에게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산 위에 성을 짓고 도읍한 것이니, 졸본-천 동쪽의 흘승-골-성은 이 새로운 도읍이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이름 가운데 남은 한 글자, 골骨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흘승-골-성과 관련된 단어인 황-룡을 살펴보면 황-룡이 골-령에 나타났다[Q-6:①]고 적고 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03년 03월 기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곧 황-룡이라는 이름의 무리 가까운 그 봉우리[嶺]의 이름이 었습니다.


Q-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03년 봄 03월 ① 황-룡[黃-龍]이 ②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東明聖王)三年春三月①黃龍②見於鶻嶺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7년 04월 기사는 이곳을 또한 왕-골-령[王-骨-嶺] 곧 왕의 골-령[Q-7:①]이라고 적었는데, 꾸미는 말인 왕을 보태고 보다 간단한 글자인 골骨로 달리 적은 이름입니다. 앞서 동명-성왕을 채찍으로 대신 장사지낸 용-산[龍-山]의 봉우리 골-령[鶻-嶺]을 유리명-왕 때에 이르러서는 간단히 골-령[骨-嶺]이라고 적고 왕의 일을 되새겨 꾸미는 말을 보태었음을 보여줍니다.


Q-7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7년 여름 04월) ● (왕이) 이윽고 ① 예를 갖추어[禮]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琉璃明王三十七年夏四月)●遂①以禮葬於王骨嶺


곧 흘승-골-성은 왕이 자리를 버리고 - 그만두고 천에 오른 - 죽은 - 용-산의 골이라는 봉우리에 앞서 쌓았던 성입니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부르던 이름이 되고서는, 뒤에 부여가 처음 도읍하였고 그 뒤에는 해모수가 도읍하였고 보다 뒤에는 동명이 다시 도읍하였던 이야기를 고구려에서 모아 정리하면서 흘승-골-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적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 자료들을 결합해가면서 부여의 옛 도읍이었던 흘승-골-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것들을 적은 자료들, 다른 자료들과 함께 부여의 일을 담은 자료들을 찾아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다시 돌아가서 그러한 자료들을 통해 부여가 여기에 도읍하기까지 일어난 일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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