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4편 부여夫餘 (1) #19

예濊에 이르는 새로운 옛 길 (5/5)

by 잡동산이

부조夫租는 한서 지리지가 적은 한漢 낙랑-군의 현 이름들 가운데에 하나로 보이는데, 이것과 관련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조-예-군[夫租-薉-君]이라는 글자들이 새겨진 은으로 만든 도장입니다. 부조는 앞서 말한 현의 이름이며, 예薉는 예[濊/穢]를 달리 적은 것이니, 이 글자들은 곧 부조에 있던 예-군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조예군夫租薉君이라 적힌 은銀으로 만든 도장[印) (출처: 국가유산 지식이음 사이트 내 금석문 DB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


이러한 부조 곧 뒤에 옥저沃沮라고 달리 적은 무리 가운데에 예-군이 있었던 것은, 조-현이 되는 곳의 본래 무리인 예를 부조가 군君 곧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곧 앞서 여러 차례 북쪽의 예라고 하였던 무리가 머무르던 곳에 들어와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무리가 부조입니다.


그런데 부조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초원 4년 곧 MC-44에 만들어져 낙랑-군에 해당하는 여러 현들의 사람들을 세는 단위인 호戶, 구口의 수로 적은 목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부조가 낙랑-군에 해당하는 현이 된 것은 낙랑-군의 동-부-도위가 두어진 MC-81보다 뒤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사이 어느 시점에 부조라는 이름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앞서 부조라는 이름이 뒤에 나타난 옥저沃沮라는 이름에 해당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옥저라는 이름은 발發이 단-군의 다스림에서 점차 벗어나며 본래 스스로 무리 이름을 적던 글자인 부弗로 적게 되었듯이, 한의 다스림에서 점차 벗어나며 스스로 적던 글자로 그 무리 이름을 적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옥沃은 물줄기를 뜻하는 삼수변에 요夭가 더하여진 것인데, 글자는 본래 부夫에 해당하 부라는 글자 제일 위에 있던 세로획의 위쪽 끝이 사라져 모양이 달라진 것입니다. 러니 부조夫租라고 한漢이 적기에 앞서 그 무리가 스스로 그 이름을 적으며 쓰던 글자들 가운데 부夫에 해당하는 것은 그대로 부夫였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부조夫租라고 한이 적기에 앞서 스스로 그 이름을 적으며 쓰던 글자들 가운데 조租에 해당하는 것은 저沮였으니, 저沮를 조租로 적은 것은 앞서 한서 지리지가 맹강의 말을 인용하여 沮라는 글자의 소리는 조俎의 소리였다[AJ-1:②-③]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沮를 한에서 조라는 소리로 이어진 옛 소리로 읽었기에 같은 예 소리를 적던 租라는 글자로 적은 것입니다.


AJ-1 한서 지리지 주석: <① 맹강이 ● 말하기를 "② (沮의) 소리는 ③ 조俎였다(= 조의 소리였다)."라고 하였다.> (沮陽莽曰沮陰)<①孟康●曰②音③俎>


그런데 沮라는 글자의 '저'라는 소리로 이어진 옛 소리는 且의 옛 소리인데, 서鉏라는 글자에서 보이듯 且의 옛 소리는 또한 '서'라는 소리로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곧 옥저沃沮로 되돌려진 부조夫租에 앞서 쓰던 이름은, 부서라는 소리로 이어진 옛 소리를 적은 夫沮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편의상 부여라고 적고 있는 夫餘의 소리인 부서에 해당하니 뒤에 한에서 夫租로, 보다 뒤에 그 무리가 스스로 沃沮라고 적은 이름은 본래 부서였습니다.


곧 부여가 본래 도읍하였던 흘승-골-성을 떠나 자리잡은 곳이 북쪽의 예가 있는 땅이었고, 부여가 그 우두머리 노릇을 할 때에 예가 스스로 부여를 적은 것이 부서夫沮였습니다. 뒤에 불내-성을 치治로 하던 한漢의 동-부-도위를 따를 때에 한은 그 이름을 부조夫租라고 적었고, 보다 뒤에 도위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스스로 적던 이름, 삼수변을 더한 夫가 夭가 달라진 것이 옥저沃沮였습니다.


옥저에 대해 그 이름을 동-옥저[東-沃沮]라고 은 것은 흘승-골-성을 떠나 동-부여[東-夫餘]라고 이르던 부여에서 옥저가 비롯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동-옥저의 북쪽과 남쪽을 구분하는 북-옥저[北-沃沮]와 남-옥저[南-沃沮]라는 단어는 쓰여도 서-옥저[西-沃沮]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여가 건너와 다스리던 북쪽의 예가 낙랑-군 동-부-도위가 사라지기 훨씬 앞서 그 다스림에서 벗어나 옥저沃沮라고 일컫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삼국사기 구려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0년 11월 기사는 부위염이 북-옥저를 쳤다[Q-11:③]고 적었는데, 이 시기는 MC-27/11입니다. 때 있던 곳에 머물러서 고구려를 따르는 대신 동쪽 바닷가로 달아났던 북-옥저와 그러지 않은 남-옥저를 아우르던 동-옥저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53년 기사는 동-옥저에서 사신 노릇을 하는 이가 왔다[2장 3편 D-3:①]고 적었는데, 이 시기는 MC-4입니다.


Q-1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0년) 겨울 11월 ① 왕이 ② 부위염扶尉厭에게 명령하니 ● (부위염이) ③ 북-옥저[北-沃沮]를 쳐서 ④ 그것[之]을(= 북-옥저를) 없애고[滅] ⑤ 그(=북-옥저의) 땅이 ⑥ 성城이 세워진 읍[城邑]이 되도록 하였다. (東明聖王十年冬十一月)以其地爲城邑(東明聖王十年)冬十一月①王②命扶尉厭●③伐北沃沮④滅之⑤以其地⑥爲城邑
2장 3편 D-3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53년 ① 동-옥저[東-沃沮]의 사신 노릇을 하는 이가 ② 와서 좋은 말들 200마리[匹]을 바쳤다[獻]. (赫居世居西干)五十三年①東沃沮使者②來獻良馬二百匹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3년 10월 기사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개 남짓 가들이 부-양에 이르렀다[T-2:①-②]고 적었는데, 이 시기는 MC+25/10입니다. 여기에 남-옥저의 사람들이 보이는데, 낙랑-군을 스스로 차지하려 왕조가 등돌릴 때 달아나 백제를 따른 것입니다.


T-2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3년) 겨울 10월 ①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개) 남짓 가들[家]이 ② 부-양[斧-壤]에 이르러 ③ 따를 뜻을 바쳤다[納欵]. (溫祚王四十三年)冬十月①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②至斧壤③納欵


후한서는 광무제기 건무 06년 12월 기사에 이어 이 해에 도위를 없앴다[AK-1:①-③]고 적었는데, 이 시기는 MC+30입니다. 앞에 적은 삼국사기 기사들은 모두 보다 앞선 시기에 옥저라는 이름이 이미 쓰였다고 적고 있으니, MC+30에 도위가 사라지기까지 도위의 다스림은 MC-44의 앞뒤를 포함하는 시기, 불내-현으로 건너가 불내-예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제외한 현재의 태백-산맥 동쪽의 예 사람들에게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AK-1 후한서 광무제기: (건무 06년 겨울 12월 28일[癸巳]) ① 이 해 ② 처음 ③군들[郡], 국들[國]의 도위都尉 벼슬을 없앴다. (建武六年冬十二月癸巳)①是歲②初③罷郡國都尉官


이것은 또한 부여가 그 땅으로 옮겨 다스리기 시작하던 시기의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부여가 한이 새로 열려고 한 옛 길 건너, 뒤에 그들을 다스리던 부여가 북쪽에 따로 잡은 뒤 스스로 옥저라고 이르던, 그 땅에 이르던 상황을 정리해보지요. 전한서가 적은 바 한漢이 평양과 현토-군을 잇는 길을 열고 남쪽 낙랑-군과 임둔-군의 동-부에 도위를 두어 그 동쪽에서 앞서 충돌한 무리를 경계한 뒤의 상황을 적은, 앞서 살펴본 자료들을 아래에 모두 다시 시간 순서대로 제시하였습니다.


G-2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한漢 무-제[武-帝]의 원봉 02년 ① 조선朝鮮을 쳤다. ② (위)만滿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③ 그(= 우거가 다스리던) 땅을 나누어 ④ 4(개) 군들[郡]로 하였는데 ⑤ (지금의) 옥저沃沮의(= 옥저에 있던) 성城을 현토-군[玄菟-郡]으로 삼도록 하였다. ⑦ 뒤에 ● (현토-군은) ⑧ (맥貊 아닌) 동쪽 변방 사람들[夷]과 맥貊이 침범하는 바 되었다. 漢武帝元封二年①伐朝鮮②殺滿孫右渠③分其地④爲四郡⑤以沃沮城⑥爲玄菟郡⑦後●⑧爲夷貊所侵
H-1 후한서 동이열전 예편: ① 현토(-군)[玄菟]은 ● 다시 ② 옮겨 구려句驪에 머물렀다. ①玄菟●復②徙居句驪
G-1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편: ① (현토-)군郡을 구려句麗 서북쪽으로 옮겼다. ①徙郡句麗西北


한이 새로 평양과 현토-군을 잇는 길을 열고 도위를 둔 일은 현토-군을 둔 일[G-2:⑥]과 그곳에 맥과 맥 아닌 다른 동쪽 사람들이 침범한 일[G-2:⑦-⑧]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때 현토-군을 침범한 무리들 가운데 이미 동-부-도위가 경계하던 낙랑-군의 동-부 대신 현토-군을 침범한 시기에 그곳을 또한 침범한 - 그곳에 들어온 다른 동쪽 사람들이 곧 부여입니다.


그 뒤 현토-군이 구려로 옮겨가고[H-1:①-②], 다시 구려 서북쪽으로 옮겨가는[G-1:①] 시기와 그 뒤에 부여는 땅에 자리잡고 예 사람들을 다스렸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이 또한 적은 바 부여-왕의 도장에 적힌 예왕지인이라는 글[AL:①-②]은 바로 이 때 비롯된 것입니다. 곧 예왕지인은 북쪽의 예를 다스리며 만든 것입니다.


AL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① 그(= 부여-왕의) 도장의 글은 ● 말하기를 ②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고 하였고 ③ (부여-)국國에 ④ 옛 성城이 있으니 ⑤ (그 성을)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⑥ 예-성[濊-城]이라고 하였다. ● 아마도 (부여가 있던 곳이) ⑦ 본래 ⑧ 예濊, 맥貊의 땅이었고 ⑨ 부여가 ⑩ 그[其](=예, 맥의 땅) 가운데에서 왕 노릇을 하였던[王] 것이었으리라. ①其印文●言②濊王之印③國④有故城⑤名●⑥濊城●蓋⑦本⑧濊貊之地⑨而夫餘⑩王其中


예-왕의 도장은 또한 앞서 살핀 자료들 가운데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6년 02월 기사가 북명 사람들이 예-왕의 도장을 바쳤다[2장 3편 D-4:①-④]고 적 구절에 이미 나왔습니다. 이 시기는 MC+19며, 북명北溟은 남쪽의 예가 머물던 명-주[溟-州]의 북쪽 땅이니, 곧 북쪽의 예가 머물던 땅입니다.


2장 3편 D-4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6년 봄 02월 ① 북명北溟 사람들[人]이 ② 논밭을 갈다가 ③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는 ④ 그것[之](= 예-왕의 도장)을 (왕에게) 바쳤다[獻]. (南解次次雄)十六年春二月①北溟人②耕田③得濊王印④獻之


이 예왕지인은 부여가 북쪽으로 떠난 뒤에 동-옥저 가운데 북-옥저에서 일어나 예의 우두머리 노릇하던 사람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MC-27/11 북-옥저가 고구려에 깨트려진 뒤에 사라졌다가 MC+19 남-옥저에서 다시 나타나자 곧 신라로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참 뒤에 신라가 옥저 땅을 차지하는 데에 큰 명분이 되어주었는데, 신라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에서 살필 것입니다.


돌아가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이 이어 적은 부여-국의 예-성[AL:③-⑥]은 조금 다른 곳입니다. 부여가 예왕지인을 만들어 예를 다스리다가 뒤에 그 사람들 일부와 함께 북쪽으로 가서 자리잡은 일로 말미암아 지어진 곳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부여 (2)에서 그 상대에 대한 자료들과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삼국지 위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은 앞서의 일들에 대해 그 까닭을 추측하였는데, 그 가운데 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의 맥이 바로 앞서 다른 동쪽 변방 사람들 - 부여를 포함한 무리들이 현토-군을 침범하던 시기에 또한 현토-군을 침범한 다른 무리입니다. 부여가 이 때 마주한 맥 가운데 일부를 또한 따르도록 하였고, 부여가 예와 맥이 있는 땅에서 왕 노릇을 하며 그들을 다스렸던[AL:⑦-⑩] 것입니다.


부여를 따르지 않은 다른 맥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기이편이 어떤 기록을 인용하여 어떤 때[或]에 평양-성이 맥-국이 되었다[AM:①-③]고 적었습니다. 이 맥-국은 앞서 신라의 북쪽 변방을 침범하는 불내-현, 화려-현의 군사들을 막은 맥-국과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앞서 현토-군을 침범한 뒤에 그 무리들이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맥에 대해서는 고구려 동명-성왕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AM 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어떤 기록: ① 어떤 때[或] ② 평양-성[平壤-城]이 ③ 맥-국[貊-國]이 되었다. (或云)①或②平壤城③爲貊國




그리하여, 이제 부여가 본래 자리잡았던 발의 땅에서 떠나 자리잡은 흘승-골-성을 또한 떠나 동쪽 바닷가, 부여의 다스림을 받다가 뒤에 스스로 옥저라고 하던 북쪽 예 사람들이 있던 땅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이 일들은 현토-군이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간 MC-74지 일어난 것들입니다.


이렇게 북쪽의 4개 군들에 일어난 일들과 그 뒤에 이어진 일들은 그것들을 멀리서 전하여듣던 한韓과 진辰에게 또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어 일어난 그들의 움직임들은 3장에서 이어 다루기로 하고, 일단 부여의 일들이 일어나는 사이 주변에 일어났던 몇 가지 일들을 새로운 주제로 하여 다음 글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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