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가 옮겨가는 사이 (1/8)
앞의 글까지는 부여가 옮겨가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내었는데, 사실 이 일의 시작과 끝 사이에 그 주변의 여러 무리들에게 또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같은 시기에 일어나 다른 무리들에게 또한 영향을 주었던 일들을 정리합니다.
그 가운데 첫번째로 아야기할 일은, 앞서 살핀 바 있는 MC-1030전부터 단-군이라는 호를 쓰며 이어오던 다스림이 MC-77후 마침내 끝나게 된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내용들을 통해서, 이 일을 살펴보도록 겠습니다.
본래 발의 서쪽 땅에서 들어온 조선 사람들이 이룬 무리가 이름을 부서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이어 그 우두머리의 딸이 단-군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부루를 새로운 우두머리로 섬겼습니다. 그 뒤에 부여가 흘-승골-성으로 옮겨 도읍하였는데, 다시 그 뒤에는 부조라는 이름으로 한漢의 현이 두어지는 곳, 달리 북명이라고 이르던 북쪽의 예가 머무는 곳으로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처음 조선 사람들이 들어와 머무르던 곳을 떠나 흘승-골-성으로 옮겨간 상황입니다. 우두머리의 이름 부루가 결국 뒤에 남아 비류가 된 것을, 앞서 왕검이 떠난 평양에 그 이름이 남아 그곳의 성을 왕검-성이라고 하였던 것을 통해 보면, 부루가 떠나게 되었던 것도 비슷한 상황에서였습니다
앞서 왕검이 가까이 아버지 웅이 와서 다스리던 단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떠났던 일을 보면, 부루가 떠난 것 또한 그 아버지 단-군이 다스리던 발 사람들과 그가 그리고 또한 그가 다스리던 새로운 조선 사람들은 어울리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단-군이 조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리로 보낸 것은, 아사달의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기기에 그리하였듯, 뒤에 자신도 그곳으로 떠나려던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루가 자리잡는 데에는 적지않은 시간이 걸리자 그 아버지였던 단-군은 죽고 새 단-군이 섰는데, 그는 끝내 흘승-골-성으로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루가 나이들어 자리이을 아이가 없을 때를 노려 자신과 아들의 호를 천-제, 천-왕이라고 하였던 조선/부여 사람들의 새 우두머리에 대해 부루가 그 호를 부여-왕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새 단-군과의 관계였습니다.
곧 부루의 호인 부여-왕은 장소/무리+왕으로 된 것인데, 그 가운데 왕王은 첫 왕검의 아버지 웅의 호인 천-왕에 쓰인 것이니 단-군에 쓰인 군君보다 천-왕에 더욱 가깝습니다. 곧 천-왕은 아니지만 그 아래의 단-군과는 같거나 오히려 조금 높은 호를 쓰기로 하였던 것이니, 그러한 호의 사용은 단-군과의 거리가 멀어진 데 따른 것입니다.
부루가 그리하자, 새로 이름을 비류라고 한 곳에서 부루에 이어 남은 조선 사람들과 발 사람들을 다스리던 우두머리가 또한 스스로 서서는 조선의 후손이라고 하며 그 호를 왕, 비류-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단-군의 다스림을 따르는 무리가 더욱 줄어들었으며, 마침내 뒤에 단-군이 아사달로 - 요동-군 험독-현으로 - 돌아가 그곳의 산에 숨으니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1장 2편에서 살펴 이 시기를 MC-77후라고 하였는데, 이 시기는 이번 편에서 살핀 자료에 이미 나타난 바 있습니다. 곧 앞서 부여의 첫 위치를 적은 기록이 기준삼았던 요동-군 바깥의 오환이, 곽거병이 멀리 상곡-군에 보내 흉노를 살피도록 하였던 다른 오환 사람들을 꾀어 선대 선우의 무덤을 파게 하자, 흉노가 그것을 갚고자 군사들을 보냈던 MC-77/10에 해당합니다.
이 때 한은 장군 범명우를 보내었는데, 흉노가 곧 돌아가자 지친 오환을 쳐서 깨트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발의 서쪽 땅 가까이 자리잡은 오환이 약해지며 요동-군으로 가는 길이 열리니, 단-군이 옛 아사달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고서 그 뒤 MC-74/01 그곳에 한이 현토-군이 옮겨갈 성을 쌓자 반발한 오환이 MC-74/04[+3) 다시 한을 쳤다가 패배하면서, 단-군의 일은 앞의 일을 끝으로 더이상 전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한이 현토-군의 성을 쌓게 되었던 것은, 보다 앞서 MC-88 즈음까지 나이서 많아서도 자리이을 아이를 갖지 못한 흘승-골-성의 부여-왕 부루가, 금와를 얻어 키워 왕태자로 삼은 뒤에 앞서 호를 천-제라고 하던 새 우두머리가 그에게 떠날 것을 종용하던 차에 MC-81 한이 진-번-군을 없애고 새로운 길이 열리자, 결국 충돌을 피해 떠난 일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곧 현토-군이 동쪽 변방 사람들과 - 부여와 - 맥의 침범을 피해 옮겨간 구려 - 흘승-골-성 가까이에 머물다가 오환을 물리치고서는 옮겨갈 땅을 그곳, 구려 서북쪽으로 정하여 성을 쌓는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묘하게 시작과 끝이 이어진 이 일은 결국 구려에 머물던 현토-군이 그렇게 쌓은 성이 있는 구려 서북쪽으로 MC-74 옮겨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옛 진-번 땅은 구려 사람들과 그 서쪽 졸본에 머물러 떠나지 않고 부여 사람들, 그 북쪽의 비류에 있던 조선 사람들과 발 사람들, 그 동쪽의 환桓에서 일어난 새 우두머리가 노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뒤에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세우게 되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부여-왕 해부루에게 나이많아 자리이을 아이가 없었다고 적는 것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그렇게 부루에게 아이가 없던 일이 그 뒤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큰 전환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시기에 이르러 조선의 옛 우두머리 단-군의 다스림이 끝난 것도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