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4편 부여夫餘 (1) #26

부여가 옮겨가는 사이 (7/8)

by 잡동산이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 목간이 적은 초원 04년 MC-44 낙랑-군의 현들의 이름은 01-조선, 02-염감, 03-증지, 04-점제, 05-사망, 06-둔유, 07-대방, 08-열구, 09-장잠, 10-해명, 11-소명, 12-제해, 13-함자, 14-수성, 15-누방, 16-패-수, 17-혼미, 18-탄열, 19-동이, 20-잠태, 21-불이, 22-화려, 23-사두매, 24-전막, 25-부조였습니다. 낙랑-군이 임둔-군을 아우른 뒤의 이름들입니다.


이러한 현들을 다시 구분하여 보면, 서쪽의 07-대방, 08-열구, 09-장잠, 10-해명, 11-소명, 12-제해 그리고 동쪽의 19-동이, 20-잠태지 8개 현들이 본래의 임둔-군에 해당하였던 곳들입니다. 그리고 예 사람들이 있던 23-사두매, 24-전막, 25-부조지 3개 현들을 뺀, 서쪽의 01-조선, 02-염감, 03-증지, 04-점제, 05-사망, 06-둔유 그리고 동쪽의 13-함자, 14-수성, 15-누방, 16-패-수, 17-혼미, 18-탄열 그리고 더욱 동쪽의 21-불이, 22-화려지 14개 현들이 본래 낙랑-군에 해당하였던 곳들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태백-산맥인 단단-대-산령의 서쪽에 있던 맥의 서쪽에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가며 본래 임둔-군이던 19-잠태, 20-동이가 있고 그 북쪽에 본래 낙랑-군이던 21-불이, 다시 동북쪽에 22-화려가 있어 동쪽으로 단단-대-산령 너머 동쪽의 23-사두매, 24-전막, 25-부조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들 가까이 맥이 있던 7개 장소가, 그 서쪽의 19-잠태, 20-동이와 함께 본래 임둔-군이었던 현들이 있던 곳입니다.




처음 현들을 두었다가 맥에게 잃은 7개 현들에 이어 진-번-군을 없앤 뒤, 현재의 압록-강 남쪽의 여러 현들을 아울러 이루어낸 낙랑-군 25개 현들, 후한 말 때에 이르면 그 가운데 다시 7개 현들이 사라지고 1개 현은 이름을 바꿉니다. 곧 낙랑-군 동쪽의 18-탄열, 임둔-군 동쪽의 19-동이, 20-잠태, 그리고 낙랑-군의 22-화려와 그 동쪽에 이어진 23-사두매, 24-전막, 25-부조입니다.


이 때에 이르러서는 21-불이를 제외한 모든 동쪽의 현들이 없어졌고 불이 만이 남았는데, 도위都尉의 치治가 있던 곳이기에 달리 이름하기를 낙도樂都[AT:㉒]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광무-제가 도위를 없앤 뒤에는 다시 불이 곧 불내라는 이름의 무리로 돌아갔고, 한참 뒤에 일어난 고구려-위 전쟁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보였습니다.


AT 후한서 군국지: ① 낙랑-군[樂浪-郡]은 ... ② 18(개) 성들[城]이고(= 성들을 거느렸고) ③ 호戶가 61,492이고, ④ 구口는 257,050이다: ⑤ 조선(-성)[朝鮮], ⑥ 염감(-성)[䛁邯], ⑦ 패-수(-성)[浿-水], ⑧ 함자(-성)[含資), ⑨ 점제(-성)[占蟬], ⑩ 수성(-성)[遂城], ⑪ 증지(-성)[增地], ⑫ 대방(-성)[帶方], ⑬ 사망(-성)[駟望], ⑭ 해명(-성)[海冥], ⑮ 열구(-성)[列口], ⑯ 장잠(-성)[長岑], ⑰ 둔유(-성)[屯有], ⑱ 소명(-성)[昭明], ⑲ 누방(-성)[鏤方], ⑳ 제해(-성)[提奚], ㉑ 혼미(-성)[渾彌], ㉒ 낙도(-성)[樂都]이었다. ①樂浪郡...②十八城③戶六萬一千四百九十二④口二十五萬七千五十⑤朝鮮⑥䛁邯⑦浿水⑧含資⑨占蟬⑩遂城⑪增地⑫帶方⑬駟望⑭海冥⑮列口⑯長岑⑰屯有⑱昭明⑲鏤方⑳提奚㉑渾彌㉒樂都


그런데, 그 사이에 불이를 마주하여 그 이름을 달리 기록이 있습니다. 불이는 앞서 단단-대-산령 동쪽에 자리한 예의 23-사두매, 24-전막, 25-부조에 대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도위가 있던 곳이기에, 불이에는 그곳과 오고가는 길이 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3년 10월 기사가 남-옥저의 구파해 등 사람들이 이르러 따를 뜻을 바쳤다[T-3:①-③]고 적었으니, 그 가운데의 부양斧壤이 바로 불이입니다.


T-3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3년) 겨울 10월 ①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개) 남짓 가들[家]이 ② 부양斧壤에 이르러 ③ (관을) 두드림[欵](= 따를 뜻)을 바쳤다[納]. ④ 왕은 ⑤ 그들[之]을(= 구파해 등 20개 남짓 가들을) 받아들이고[納], ● 안전하게 ⑥ 한-산[漢-山]의 서쪽[西](= 서쪽 땅)에 두었다. (溫祚王四十三年)冬十月①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②至斧壤③納欵④王⑤納之●安⑥置漢山之西


이 때의 일과 관련하여, 보다 뒤에 앞서의 일들을 모아 적은 후한서 광무제기 건무 06년 06월 기사는 처음 - 이 일이 마침내 마무리 건무 06년 06월보다 앞서 - 낙랑-군에서 왕조가 광무-제를 따르지 않았다[AK-2:①-④]고 적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후한서 왕경열전은 보다 자세히, 왕조가 태수 유헌을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태수라고 하였다[AU:①-⑤]고 적었습니다.


AK-2 후한서 광무제기: (건무 06년 여름 06월 24일) ① 처음 ② 낙랑(-군)[樂浪] 사람 왕조王調가 ③ (낙랑-)군郡에 기대어 ④ (광무-제를) 따르지 않았다. (建武六年夏六月辛卯)①初②樂浪人②王調③據郡④不服
AU 후한서 왕경열전: ① 지방[土] 사람 왕조王調가 ② (낙랑-)군[郡] (태)수守 유헌劉憲을 죽였다. ③ 스스로 ④ 일컬어 ● (말하기를) ⑤ 대장군大將軍 낙랑-태수[樂浪-太守]라고 하였다. ①土人王調②殺郡守劉憲③自④稱●⑤大將軍樂浪太守


이 일은 왕망이 죽고 광-무제가 섰던 MC+25에 일어났던 일로 이 때 어지러워진 부조-현 - 남-옥저에서 사람들이 떠나 부조-현에서 길이 이어지니, 이 때 뜻을 달리하던 불이-현에 이른 일을 적은 것이 앞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43년 10월 기사입니다. 그러니 부양이라고 적은 곳, 사람들이 남-옥저 - 부조를 나와 이르렀던 곳은 부조와 이어지는 불이에 해당합니다.


부양에 대해서는 그 뒤 여기서 한-산의 서쪽에 이르렀다는 구절 때문에라도 자리한 곳에 대해 더욱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고 때문에 뒤에 백제의 건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깊이 다루게 될 것입니다. 여기는 다만, 그 이름이 비롯된 바를 통해 부양이 불내임을 보이는 정도까지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살핀 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고-국천-왕을 달리 국양-왕이라고 하였다[AG:①]고 적었는데, 산상-왕이 환도로 도읍하고서 국양에 옛[故]이라는 글자를 보태 것이니 국양國壤은 위나 곧 비류나의 옛 도읍을 이르던 국내國內를 달리 적은 것입니다. 양壤은 또한 內로 적은 옛 소리에서 이어진 소리 '내'로 또한 이어진 옛 소리를 가진 耐를, 斧는 그것이 적은 옛 소리에서 이어진 소리 '부'로 또한 이어진 옛 소리를 가진 不로 달리 적은 것이니 부양斧壤은 불내不耐 곧 불이不而를 달리 적은 것입니다


AG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① 국-양(-왕)[國-襄]이라고 하였다.> (故國川王)<或云①國襄>


그렇게 불내 곧 불이에 해당하는 부양에 대해,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편은 고구려 부양-현이 신라 부평-군 광평-현이며 고려 평강-현이라고 적었습니다[AV:①-⑦]. 이곳은 조선 평강-현으로 현재의 북한에 있는 평강-군 해당하는 곳입니다.


AV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편: ① (신라 한-주 부평-군에) 광평-현[廣平-縣]이 있었다. ● (광평-현은) ② 본래 ③ 고구려 부양-현[斧壤-縣]이었다. ④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⑤ 고쳐 이름하였다(= 부양-현을 광평-현이라고 하였다). ● (광평-현은) ⑥ 지금 ⑦ (고려) 평강-현[平康-縣]이다. ①(漢州富平郡)廣平縣●②本③高勾麗斧壤縣④景德王⑤改名●⑥今⑦平康縣




이제 남은 것은 하나 02-염감입니다. 다음 글에서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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