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퇴근길이 좀 찝찝하다. 나름 나쁘지 않은 하루를 보냈는데 하필 퇴근 15분 전 찝찝한 일이 일어나버린 탓이다. 머릿속으로 ‘사회생활하면 정말 하루에 오만가지 일이 다 일어나네.’라고 생각했다가 갑자기 생각의 화살이 ‘오만가지’로 향한다. 잠깐만, 오만이 그 숫자 오만인가? 밀려오는 궁금증에 논란의 초록창을 켜고 검색을 누른다.
[오만 가지 五萬가지: 매우 종류가 많은 여러 가지. 또는 그런 것.]
습관처럼 쓰던 오만가지가 정말 5와 만단위가 합쳐진 숫자라는 사실을 서른다섯 살에 깨닫고는 유레카의 기분이 들다니 어쩐지 이것 또한 찝찝하다. 그러고 나서는 이제 ‘그런데 왜 하필 오만 개일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이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한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리 그래도 오만 개까지는 아닐터인데 어쩌다가, ‘오늘 참 되다’싶은 버라이어티 한 하루에는 늘 ‘오만가지’라는 수식어가 따라오게 된 건지.
한편으론 이런 오만가지 일이 다 벌어지는 찝찝하기 그지없는 하루 정도는 뭐, 그렇게 나쁜건 아닐 수도 있다는 위로 섞인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오만가지 일 중의 하나는 적어도 오늘처럼, 무엇인가를 써야겠다는 자극을 남겨주기도 하니까. 인생은 때론, 남겨진 흔적들로만 기억되기도 하니까. 기억조차 없이 흘러간 평탄한 날들 중 하루쯤은 이런 오만가지가 벌어져야, 훗날 ‘내 인생 그래도 좀 재밌었네.’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여하튼 오만가지 일이 벌어진 하루 끝에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그 오만가지 생각 중 몇 개를 끄적이다 보니 정작 첫 단추였던 그 찝찝했던 일은 조금 아득해진다. 그래 뭐,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오늘 많이 찝찝했으면, 내일은 좀 더 괜찮은 날이 오겠지. 라고 생각해보지만 역시 잘 안돼. 어째 인생을 35년이나 겪었어도 하루하루는 이렇게 새로운 것인가. 언제쯤 난 의연해지나. 오늘 밤 잠들기 전까지도 여전히 생각이 많을 거 같다. 그렇지만 오만가지는 너무 많으니 음, 봐줬다. 그래, 사만 구천 구백 구십가지만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