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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r 18. 2021

먹고사니즘의 대화

목동 방송국 18, 단조로웠던 편성제작팀 라이프에 팀원이 새로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심장이 뛴다> 담당하던 동갑내기 남자 조연출이었는데, 굳이 실명을 거론하자면 시훈이를 처음  순간 나는 ‘남자 눈도 사슴처럼 생길  있구나라는 사실과 보이는 아름다움 앞에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하찮아질  있는 것인지, 그리고 매일 똑같은 출근과 똑같은 업무가 갑자기 얼마나 재밌어질  있는지와 실은 내가 얼빠였다는 충격적인 여러가지 사실을 동시에 깨닫고야 말았다. , 물론 그당시 시훈이는   친척뻘 - 50촌 쯤- 되어 보이는 같은 성씨를 가진 여자친구가 있었기에 그때의 마음은 정말이지 사심이 1 섞이지 않은 순도 100% 건전한 팬심이었음을 이자리에서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지금은 어떤지는 잘 모르겠고 당시만 해도 콧대 높았던 방송국 놈들은 하여간 후배 털기를 아주 쥐잡듯 했었는데 아무튼 뭔일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날도 뭔가 실수가 있었고 그래서 선배에게 무지하게 혼이 나려던 참이었다. 일체의 변명도 없이 운명처럼 주눅 들려던 찰나, 시훈이의 목소리가 선배의 말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랬다. 시훈이는 얼굴만 잘생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시훈이랑 친한 유리가 무척 부러워졌다. 그 날 이후 시훈이를 향한 나의 팬심은 2021년 2월 초- 일론 머스크발 비트코인처럼 급등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시훈이와 함께 드라마 <피노키오> 홍보영상 촬영을 마친 날 배우 이종석을 실물 영접한 -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 그 후기를 굳이 얘기했던 것이다.


시훈아, 네가 이종석보다 잘생겼어 ...


밤샘 원고와 편집이 난무하는 고단한 프로그램 제작 환경에 비하면야 편성제작팀 일은 방송계의 꿀보직이라고 칭할 만큼 평탄하기도 편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또 우리 나름대로 힘든 오르막길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아마도 일 뿐만 아니라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누구나 겪었을, 다가올 앞으로에 대한 고민들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거 같은데

그런건 없다. 원래 더럽게 힘들어야 벌리는 게 돈이라더라.


나의 푸념에, 시훈이는 좀 더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그치만 시훈이도 그땐 조물주 아래 건물주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이냐면, 나는 그날 이후로 인생의 엿가락 같은 순간마다 시훈이의 저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냥 막연히 흐릿한 옛날 기억처럼이 아니라 너무나 생생하게, 정말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그래서 어제도 시훈이 생각이 났다. 뇌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이 힘들고 사람이 힘든 날이었기 때문에. 지침과 빡침이 콜라보레이션으로 마음에 수를 놓아 잠들기도 쉽지 않은 하루를 보낼 때마다 문득 8년 전 저날의 대화가 마음에서 살아난다. 이상주의자였던 나는 처음에, 시훈이의 답변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 서른이 되고, 서른 하나가 되고, 서른 둘이 되고, 서른 셋이 되고 넷이 되면서 그리고 마침내 서른 다섯이 되면서 그녀석 말에 자꾸만 더, 더 진심으로 끄덕이게 된다. 그래, 원래 먹고 사는 건 더럽게 힘든거다. 그래 원래 다 그런거야. 아마도 대부분의 인생에게 다 그런 걸꺼야- 물론 그런 생각은 그 자체로 위로는 되지 않았는데 뭐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디는 가벼운 진통제 정도는 되어 주고 있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지인 두 명을 만났다. 두 시간 반 동안 좋은 음식을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모든 순간이 너무 재밌고 즐거워 계속 끅끅거리며 웃어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업무도 무난했다. 칼퇴를 했고, 스케줄링도 괜찮았고, 킹받게 하던 3년차 조무래기도 좀 정신을 차린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참 괜찮았다. 아니, 너무 좋았다. 어제가 무척 괴로웠던것도 맞는데 오늘이 너무 행복한것도 맞다. 참, 산다는 게... 그래 참 이런거다.


아무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앞으로도 대부분의 날들에 나는 마음 속으로 시훈이와 그날의 어른스러운 대화를 나눌 것이고, 수없이 많을 그날들 사이 사이에선 오늘같이 철 안든 여자애처럼 끅끅 웃어대기도 할 거라는 것이다. 굳이 이러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삶이란 녀석은 행복과 고통 사이에서 아주 기가막히게 균형을 잘 잡는다. 그래서 함부로 포기할 수도 없다. 오늘 덕분에, 나는 사는 게 다시금 정말로 의미있어졌다는 생각에 확신이란 걸 더하게 되었으니까.


아쉬우나 이 좋은 순간도 다 지나가리라. 내일은 또 어떤일로 바닥을 칠지 모르니 이제 들뜬 마음은 그만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하지만 뭐 조금 들뜨면 어떤가. 마음 구석에 있던 먹고사니즘의 대화를 꺼내는 날도 영혼까지 진심으로 웃을 소중한 지인들과의 날들도 여전히 펼쳐질것이고, 그 아찔한 균형 사이에서 어쨌거나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훌륭하진 못해도 열심히는 살아낼 것이다. 분명한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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