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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r 07. 2022

추석을 보내며

추석이라 엄마는 신이 났다. 밀린 드라마 리뷰와 지인들 근황 토크에 제일 재밌는 리액션을 하는 둘째 딸이 왔기 때문이다. 아빠와 나 엄마, 세 사람은 이틀간 먼 곳 가까운 곳을 다니며 차 안에서, 고궁의 숲길과 수변공원의 돗자리 위에서 유쾌하고 오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군산 바다를 이야기를 하다가도 서해의 생선 맛을 이야기하다가도 어쩐지 우리는 외할머니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날 들었던 어린 소녀의 이야기들은 정말이지 내가 35년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리고 엄마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몰랐을 외할머니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외할머니는 1926년에 충북에서 태어나셨다. 열일곱이 되던 해, 학교에 가는 대신 저 멀리 부산방직공장에 취업을 나갔는데 물론 원해서 한 선택이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은 절정에 이르렀고,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한 사람의 노동력이라도 살뜰히 착취해가던 시절이었다. 밤낮없이 고된 노동을 바쳤지만 돌아오는 건 배고픔이었고 작은 홈을 파놓은 형편없는 나무 식기에 주먹만한 밥 한덩이를 얹어 주는 것이 식사의 전부였다고 했다.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공장을 둘러친 담장은 너무 높아서 도망칠 수도 없는 숨막히는 환경이었다고 했다. 한가지 작은 일탈은 있었다. 동전에 끈을 매달아 담장 밖으로 던지는데 그렇게 하면 밖에 있던 떡장수가 그 끈에 떡을 다시 매달아 담장 안으로 넘겨주었다고 했다. 살아남는 것만이 생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으니까. 안과 밖, 억압받는 서로를 향한 연민과 위로로 그때의 사람들은 고된 생을 견디고 또 견뎌내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의 승리로 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고 동시에 어린 방직공들의 고된 날들에도 끝이 났다. 급여 대신에 받은 베 한필을 들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 베를 큰언니의 혼례비용으로 쓰겠다고 한 어머니의 말씀이 소녀를 자극했던 것 같다. 나도 시집을 가겠다고 소녀는 선언을 했고 집안 어른 한 분이 중매를 놓으셨단다. 베 한 필은 다행이 소녀의 혼수가 되었는데 그때 신부는 열아홉, 신랑을 스물 둘이었다. 전라도 군산출신의 어린 신랑은 혈혈단신이었지만 영민하고 부지런해서 가장으로 살림을 넉넉하게 꾸렸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 배가 뒤집혀 한꺼번에 혈육을 잃던 그날의 그 깊은 슬픔 때문에 술에 취한 밤이면 서러움을 오래도록 쏟아내었다고 엄마는 기억했다.


외할머니는 결혼을 하고 낳은 아이 둘을 물가에서 사고로 먼저 보내고 다시 낳은 아이는 병으로 먼저 보냈다고 했다. 그 뒤로 딸 셋과 아들 둘을 차례로 낳으셨는데 엄마는 다시 낳은 아이들 중 셋째 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사고로 혈육을 잃은 아픔에 더해 사고로 자식들까지 잃어버려 마음에 깊은 병이 났다고 했다. 조상신을 열심히 섬기던 외할머니는 그 사건 이후 이웃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신앙이 흔들리거나 변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내 기억에도 외할머니의 신앙은 순수하고 한결같으셨다. 우리 집에  오신 날이면 항상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주무셨는데 새벽 인기척에 눈을 떠보면 할머니는 어느새 일어나 작은 무릎을 꿇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생각해보니 나는 외할머니를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나는 처음부터 외할머니를 외할머니로만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이기 전에 그녀는 누군가의 막내딸이었고 아우였으며 누군가의 동료이자 동무였고 그 이후에야 누군가의 아내가 됐고 엄마가 되었고 나의 할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생각하게 된다. 배고픈 날에는 어떻게 견뎠는지, 담벼락위로 돈을 던지는 게 겁나진 않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이 겁나진 않았는지, 혼수는 무얼 해가셨는지. 아이들을 마음에 묻던 날과 먼저 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은 어떠했는지. 이젠 참 궁금한 것이 많은데 엄마의 기억으로 그려보고 나의 마음 안에서만 작게 여쭐 수 있을 뿐이다.


외할머니는 2004년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지만 여전히 우린 그의 기억을 나누고 그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그럴때면 외할머니가 부재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낯설고 어색하다. 누군가의 삶과 기억에 이토록 생생하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죽음인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잊히지 않기 위해 가족으로 대를 잇고 제사로 자신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잊히지 않으면 죽지 않은 거니까.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짓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의 흔적을, 나의 이름을 오래도록 부른다면 그것은 그날까지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영웅들은 영원히 살아 존경을 받고 비겁한 이들은 영원히 죽지 못하고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미 심판대에 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눈처럼 녹아 없어지는 인생이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추석을 보내며, 나는 우리 가족에 대해 새로운 걸 또 하나 배워간다. 외할머니의 어린 시절은 가슴아픈 근현대사였지만 시대가 준 버거운 삶 속에서 낙담할 틈 없이 그저 열심히 살아야 했다는 것. 시장에서는 늘 흥정을 잘 해서 알뜰하게 장을 보셨고 막내딸인 엄마를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간식을 종종 몰래 사주셨다는 것. 고추장을 달큰하게 잘 담그셨고 비상금은 마당 한쪽에 땅을 파놓고 비닐에 담아 숨기셨으며 가끔씩 술빵을 쪄 놓고 무엇보다 농사를 부지런히 지으셨다는 것. 그리고 그런 외할머니를 이야기 할 때면 이미 환갑이 된 엄마도 싸리문 앞에서 외출한 엄마를 기다리던 일곱살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을. 또 하나, 나의 질문에 ‘너 가고 싶으면 가아. 너 먹고 싶으면 시키구’ 라고 늘 돌려 답하던 엄마의 충청도식 화법이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이제는 그 미스터리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엄마는 5년 째 다이어트 중이신데 어쩐지 살이 좀 더 찐 것 같으며 재방 중인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로 역사 공부에 한창이시고 서울에 있는 고궁과 차박과 캠핑에, 그리고 새로운 도전에 의외로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두가 길고 길었던 이번 추석 연휴 덕분이다. 다음 연휴가 되면, 아니 그냥 다음에 집에 내려가게 되면 어쩌면 나는 몰랐던 아빠에 대해 그리고 아빠가 늘 무서워하셨다던 할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나누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옛날이야기는 안할지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할 이야기들은 많을 것이다. 언니의 대학원 공부와 나의 유치한 직장생활과 동생의 무심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고 아빠의 간헐적 출장과 엄마 지인들의 새로운 근황에 대해 나눌 것이다. 흘러가는 이야기들은 여전하겠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단단한 닿음을 붙잡고 끊임없이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202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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