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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03. 2023

[오늘을 남기다] 조금의 상처로 쓸모를 다 해버린 신세

작년 명절에 시댁 형님들한테 그릇 선물을 했다. 지름이 20cm 정도 되고 둘레의 담이 5cm 정도 되는 그릇이다. 명절 선물을 살 때는 나한테도 필요한 걸 고른다. 핑곗김에 내게도 선물을 하는 셈이다. 널찍한 그릇에 밥과 반찬을 한 번에 담아 식판처럼 개인 접시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둘레에도 높이 감이 있어 찌개나 라면 그릇으로도 좋았다. 살짝 무게감이 있었지만.  그 그릇은 금세 내 주방에 최애 그릇이 되어버렸다. 그릇은 모든 걸 담아냈다. 


그런데 그 그릇에 이가 나가버렸다. 

설거지하려고 고무장갑을 끼고 쌓인 그릇들을 내려다봤는데 그 그릇의 둘레 한쪽이 살짝 떨어져 나가 있었다. 쌓인 그릇들을 조심스럽게 치우며 사금파리를 찾았다. 수챗구멍에 날카로운 조각 하나가 걸려있었다. 떨어져 나간 면은 날카로웠다.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며 조각을 그릇에 대보니 조금의 틈도 없이 딱 맞았다. 그릇이 상한 것도 안타까웠지만 이 그릇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 안 좋았다. 

어릴 적 엄마가 이 나간 그릇은 복 나간다고 버렸었다. 그때는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 살림을 살면서 그릇에 살짝 상처가 있다고 버리는 게 너무 아깝다. 특히나 이번 그릇은 더 그랬다.    

그런 미신 따위는 모른척하고 그릇을 닦아 식기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남편이 보면 당장 버리라고 할 게 뻔했지만, 출장 간 남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냥 내가 쓸 생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쓰다 보니 그 그릇의 흠은 보이지 않았다. 여느 그릇들과 똑같이 사용했다. 


며칠 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왔다. 남편은 집에 있는 날이면 나보다 더 주방을 자주 드나든다. 그러니 그 그릇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이니 단박에 알아차렸다. 


-뭐야, 이 나갔네. 여보 몰랐어? 이거 버려야겠다. 쯧쯧 아깝네. 언제 나갔지?

그 그릇의 쓸모를 잘 아는 남편도 안타깝긴 마찬가지였다. 


-어, 그러네, 그냥 쓰면 안 되나? 거기 조금 떨어져 나간 건데.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안돼. 이 빠진 그릇은 안 쓰는 거야.

남편은 단호했다


-왜? 음식 담는 데 아무 문제 없잖아.

-그게 그래. 아니, 그렇데. 옛날부터. 복도 달아나고, 또...

다칠 수도 있고, 미세한 가루라도 나오면 어떡해?

남편은 끄집어낼 수 있는 이유를 다 끄집어내어 내게 말했다.


-아, 그래?


복이 달아난다는 말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따위 미신으로 그릇을 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래도 그 이유가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부분이 날카롭지도 않았고, 미세한 가루가 음식물에 들어간다는 말도... 


-그럼 내가 조심히 쓸게.


-안 돼.

남편은 더 이상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릇을 봉지에 넣어 쓰레기통 옆에 두었다. 나는 그저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의 상처로 쓸모를 다해버린 ‘최애 그릇’의 신세가 안타까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가 살짝 나간 그릇은 그냥 써도 괜찮다는 증거를 찾아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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