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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o Mar 23. 2020

왕과 쿠데타, 이상한 나라의 태국 정치

여행은 사유하는거야

왕이 승인하지 않으면 실패로 끝나는 태국의 쿠데타


태국에 대한 첫 기억은 대학교 전공 수업 시간이었다. 보통 정치외교학과의 수업은 교수가 그 주에 있었던 정치 이슈를 짧게 평론하며 시작된다. 당시 핫이슈는 재벌 출신 탁신 총리를 쫓아낸 태국의 쿠데타였다. 교수의 설명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쿠데타와 왕의 관계였다. 태국에서는 쿠데타를 일으켜도 마지막에 왕이 승인하지 않으면 실패한 쿠데타가 되고, 주동자는 망명을 떠난다. 사실 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 나라가 왕국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인지했다. 어쨌든 태국의 쿠데타는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쿠데타는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것이다. 애초에 누군가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입헌군주국의 왕은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쿠데타가 숱하게 일어나면서도 마지막 성공 여부는 입헌군주인 왕이 결정한다. 인정받지 못하면 땡깡부리는 것 없이 조용히 물러나 버린다. 이때 태국은 참 독특한 정치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박혔다. 


▲ 입장부터 발 디딜 틈 없는 왕궁
▲ 인파 속에서도 왕궁의 화려함은 가려지지 않는다


입헌군주인 듯 입헌군주 아닌…


먼저 입헌군주가 쿠데타를 승인하는 근거는 태국의 헌법 조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헌법 1조 3항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주권은 태국 국민에게 있다. 왕은 국가 수장으로서 그러한 권력을 의회, 내각, 그리고 헌법 조항에 따라 행사해야 한다. 
Sovereign power belongs to the Thai people. The King as Head of State shall exercise such power through the National Assembly, the Council of Ministers and the Courts in accordance with the provisions of the Constitution.


입헌군주제라고 하기에, 그리고 법조문이라고 하기에 매우 모호한 말이다. 어쨌든 쿠데타가 일어난 국가 위기 상황에 국왕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 해도 왕실의 실질적 힘이 없다면 저 애매한 법 조항은 사장될지도 모른다. 태국 왕실이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푸미폰 전 국왕 개인의 카리스마 때문이라고 본다. 푸미폰 국왕의 정치적 업적으로 1973년 민주화 운동 때 왕실 문을 열어 학생 시위대를 구출한 일이 있다. 또 1992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시위대와 진압군을 중재하기도 했다. 여기에 재임 초부터 민생 행보를 적극적으로 했는데, 직접 낙후지역을 돌아다니며 서민과 함께 생활했던 모습이 지금도 태국인들에게 각인 되어있다. 또 빈곤 구제를 위한 각종 개발 프로젝트를 왕실이 직접 주도했다. 오늘날 태국 커피가 유명해진 것도 전통적 낙후 지역인 동북부 산악지방에서 주로 재배하던 아편을 이 프로젝트를 통해 커피 재배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


물론 푸미폰 국왕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총 15회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승인하지 않은 것은 6건에 불과하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군부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을 것이다. 반대급부로 태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대신해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애초에 국왕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헌법에 넣은 것이 잘못이다. 현대화 과정에서 전제군주제를 깔끔하게 청산하지 못한 탓이다. 태국 스스로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원인이다. 어쨌든 실권은 군부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왕이라고 그들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군부가 얼마나 정권을 꽉 쥐고 있었으면 신격화된 국왕조차 그들과 타협했을까 싶다. 


▲ 왕을 알현할 때 이렇게 몸을 바짝 엎드린다



'방콕에서 잠시 멈춤'을 출간했습니다. 

더 생생하고 재미있는 방콕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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