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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o Aug 05. 2020

상담사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였다


“원래 저는 관계를 끊으면 모든 기억까지 다 지우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상담을 하는 동안에는 계속 이전의 관계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계속 떠올리는 게 괴로워요. 지우고 싶은데.”


“왜 그 기억까지도 다 지우고 싶어요?”


“자존심이 상해서요. 저한테는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이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닐 거거든요. 지금도 제 꼴을 보면 아마 비웃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제 불행을 보고 행복을 느낄지도 모르죠.”


“그럼 그동안의 추억은 어떡해요? 사람들이랑 함께 쌓은 추억은 있잖아요.”


“어쩔 수 없죠. 그것도 다 지워야죠. 저 혼자만 그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리워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들은 그게 추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텐데, 저만 바보 같잖아요.” 


“참 슬프네요. 추억도 지워버리고 싶다는 말이…”



결국 상담사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선생님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인데, 항상 해왔던 일인데, 나는 지금 담담한데. 선생님의 반응을 보니, 수많은 사람을 봐온 심리상담사도 나처럼 기억을 지우려 노력하는 사람은 처음인가보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한 추억이 많겠지? 다들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며 살아가겠지? 이번에도 내 성격이 문제다. 내가 문제다. 


예전에 한 독서 모임에서 최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라고 답했지만, 거짓말이다. 졸업은 그냥 후련한 거지 행복하기까지 한 건 아니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하다 대학교 때 밴드를 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것을 겨우 떠올렸다. 슬의생에서 양석형(김대명)이 밴드를 다시 시작하는 걸 병원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조건으로 내세운 그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시절이 하루하루 기쁘기만 했던 건 아니다. 멤버들끼리 많이 싸우기도 했고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는 미친 짓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함께 연습하고, 공연하고, 여행을 가고,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기타를 튕기던 행복한 기억이 아직도 그립다. 20대의 대부분을 도서관에만 처박혀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옛날 사진을 보니 이런저런 많은 일이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화려한 20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있고 행복했다. 


자존심 때문에 행복한 추억을 잊겠다는 게 참 꼴통 같은 소리로 들리긴 하다. 어쩔 수 없다. 자꾸 그 추억을 떠올리면 잠깐은 행복하지만, 그보다 더 큰 비참함과 괴로움이 몰려온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친구라는 존재와 깔깔대며 웃을 일은 없을 듯싶은데,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면 이 비참함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렵다. 마음 같아서는 나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그게 불가능하니 내가 기억을 지워버리는 수밖에.


이런 건 정말 쓰지 말아야 할 글이다. 전하려는 메시지도 불분명하고, 결론이 긍정적이지도 않다. 그렇다. 어차피 나라는 인간의 생각이란 것은 정말 이상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을 것도 잘 안다. 오늘은 그냥 반찬 투정하듯 의미 없는 투정을 부리고 싶다. 그러나 진심으로 바라는 한 가지는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모든 기억이 지워져 있는 것이다. 오늘 밤도 부디 내 뇌가 리셋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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