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함께할 결심
스타트업 A와 B로의 첫 출근날을 떠올리면 교집합처럼 겹치는 장면이 있다. 바로 텅 빈 사무실. 첫날이니만큼 서둘렀지만 너무 일찍 도착하면 나를 맞이할 누군가의 업무 시간을 당기는 실례를 범할 것 같아 부러 슬렁슬렁 느리게 걸었다. 출근시간 10분 전, 도착한 사무실엔 불이 꺼진 채 방범장치의 붉은 불빛만 깜빡깜빡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음. 여기가 아닌가? 12분을 기다리자 면접을 진행했던 실장님이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스타트업 입사 첫날, 불 꺼진 사무실을 마주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길. 근태보다 업무 성과를 중시하는 스타트업에 정시보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은 드물다.
B에서는 A보다 조금 더 빠른 환대를 받았다. A와 마찬가지로 10분 먼저 도착했는데 무려 두 명이나 먼저 와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대표님이었는데 넓지 않은 사무실 이곳저곳을 살뜰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 집에도 있는 캡슐커피 머신 사용법부터 문을 닫으면 폐쇄공포증이 발현될 것 같은 어둡고 좁은 안마의자 룸까지 안내받고 자리에 앉았더니 책상 위 A4지 한 장이 보였다. 거기엔 업무툴 설치와 같은 간소한 매뉴얼이 안내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15분 사이에 몇 안 되는 전 직원이 속속 등장했고 한 명 한 명 인사를 마치자 첫날의 간결한 온보딩 일정이 완료되었다.
온보딩은 셀프로
첫날 일정은 스타트업이나 대기업이나 대동소이하다. 먼저 업무의 기본 환경을 세팅한다. PC, (존재한다면) 이메일, 메신저, 프로젝트 관리 툴 등을 설치하고 아이디를 부여받는다. (역시 존재한다면) 사내 자료와 정책을 확인하고 간단히 숙지한다. 팀원과 인사를 나눈다. 슬슬 긴장감이 옅어지고 무료해질 무렵 누군가 커피챗을 청하면 반갑게 응한다. 이튿날부터는 본격적인 실전이며 셀프 온보딩이 시작된다. 온보딩은 길어도 1개월 내에 끝내기로 한다.
대기업 온보딩은 체계적이고 표준화되어 있다. 회사의 역사, 비전, 문화, 규정을 포괄하는 신입사원 연수라는 거한 교육이 끝날 즈음이면 '동기사랑 나라사랑, 우리 회사 최고'가 어느새 뇌 속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이 교육은 개인을 드러내기보다는 집단에 자연스레 소속되는 데 중점을 둔다. 경력직 역시 신입사원보단 간략하지만 대부분 교육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스타트업에선 교육을 생략하고 즉시 실전에 투입한다. HR이 있는 조직이라면 입사키트 제공, 온보딩 데이, 커피챗, 랜덤런치 등 친밀도를 높이려는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없는 곳이 더 많지 싶다. 업무는 선 교육, 후 실무가 아니라 선 실무, 후 깨닫기를 통한 체득이다. 여기서 필요한 역량은 주도성과 빠른 속도, 무관심에 굴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협업 네트워크는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대표님과 주요 경영진, 협업 팀과의 셀프 네트워크 쌓기도 온보딩에 포함된다.
나무보다 숲을 먼저
입사 전에도 BM을 충분히 조사했겠지만 내부자만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 고객군과 주요 경쟁사를 파악하고 소속 팀의 KPI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역할과 개선 가능한 사항, 기대되는 성과를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언제나 전체를 먼저 본다. 회사의 방향성을 주시하고 그에 맞춰 우리 팀이 할 일, 그리고 내 역할까지. 이렇게 숲에서부터 나무로, 가지에서 나뭇잎까지 차근차근 넓은 시야에서 안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내 일만 바라봐선 안된다. 모든 일은 유기적으로 묶였고 함께 움직인다. 오늘 퇴근 전 누군가의 작은 날갯짓이 내일 새벽 댓바람부터 폭풍으로 돌아올 수 있다.
3개월, 그 안에 핵심 멤버가 될 것
앞서 처우협의(1)의 글에서 언급했지만 근로계약서의 3개월 수습기간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공휴일이 없다고 가정하면 3개월은 약 65일, 520여 시간이다. 스타트업에서의 3개월은 계곡물처럼 빠른 속도로 예측 불가능한 일이 버라이어티 하게 이어진다. 백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사람을 어찌 평가하나 싶지만 변화무쌍하고 밀도 높은 업무가 일상인 스타트업에선 넉넉한 시간이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회사만 입사자를 평가하는 게 아니다. 입사자 또한 다각도로 회사를 평가해야 한다.
이때, 회사에서 '우리와 맞지 않다'라고 판단한다면 수습 종료와 동시에 작별이다. 몇 차례 목격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수습 종료 후 퇴사 통보를 받는 사람들. 업무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조직과 핏이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스타트업에서 입사자에게 3개월 차에 기대하는 건 '적응'이 아니라 '기여'와 '더 큰 기여의 가능성'이다. 특히 경력직이라면 작은 기여라도 반복해서 만들어 내야 한다. 입사 6개월쯤 됐을 때 대표님이 'OO님, 이제 입사한 지 1년쯤 됐죠?'라고 물은 적이 있다. 반년 정도 됐다 하니 '그것 밖에 안 됐어요? 왜 이렇게 오래된 것 같지?'라며 놀라워하셨다. 아마도 내 존재가 조직의 오래된 일원처럼 자연스러웠거나, 기여도가 높았다 느꼈거나 스타트업 특성상 함께한 업무와 시간이 많아서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살짝 지쳐 보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칭찬으로, 대표가 주목하는 핵심 멤버가 된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대기업은 조직 규모가 크고 프로세스가 방대하다. 긴 시간 구축된 프로세스와 매뉴얼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며 담당자가 조직을 이탈하더라도 대체된 다른 이가 금세 빈자리를 메울 수 있도록 프로세스가 설계되어 있다. 이는 일정 허들만 통과하면 누가 담당자가 됐든 무관하단 뜻이고 여기서 1인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다르다. 어디든 인재가 중요하다지만 스타트업에서 개인 1인의 역할과 파급력은 대기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때문에 조직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전문 자격증을 취득하고 유명한 대기업에서 화려한 실적을 달성한 커리어를 가졌다 해도 원치 않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평가 기간이 끝나고 계속 함께하자는 결심이 서면 그제야 진정한 팀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