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은 날리고 실질은 남기고
도장 대신 이모지, 협조전 대신 슬랙
업무협조전이란 게 있다. 다른 부서에 관련 업무 협조를 요청하거나 진행을 승인받기 위해 사용하는 내부결재문서다. 회계팀을 기준으로 보면, 검토 완료한 비용 집행은 자금팀으로, 매출자료는 영업팀으로, 회계프로그램 시스템 오류 수정은 IT팀으로 요청한다. 업무의 성격이나 경중에 따라 실무자부터 임원까지 도장을 받아둔다. 구성 항목은 요청자, 요청받는 자, 요청 배경과 취지, 구체적인 내용, 기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단한 업무는 구두나 이메일로 요청하지만 주요 업무는 공식적인 문서를 남긴다. "나 너한테 요청했어. 너도 오케이 도장 찍었지. 그러니까 기한까지 안 하면 네 책임이야." 이렇게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문서에는 합의자, 결재자, 참조자, 수신자가 등장하고 그 복잡한 자리마다 주인이 있다.
신입사원 때였다. 장고 끝에 처음 쓴 협조전이 반려 알림으로 돌아왔다. 하필 내 담당 임원까지 결재를 마친 문서라 바로 팀장에게 호출을 당했다. 알고 보니 단순한 이유였다. 합의와 결재 순서를 바꿨단다. 순간 얼굴이 벌게지고 머릿속 숨구멍이 열리며 모락모락 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IT의 새로운 팀장이 메신저나 메일로 요청받던 초간단한 에러도 협조전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누가 봐도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절차였다. 우리 팀장이 득달같이 요청한 미팅에서 애초에 시스템을 똑바로 만들지 그랬냔 샤우팅과 함께 협조전은 없던 일로 됐다.
스타트업에 와서 신선하다 느낀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업무협조전의 부재다. 대신 슬랙 요청과 노션 댓글, 피그마 코멘트로 업무가 진행된다. 비록 문서가 없더라도 누가 무슨 일을 맡았고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원한다면 누구나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0월 00일까지 10월 판매 데이터 엑셀 형태로 추출 부탁드려요." 한 줄이면 요청이 이루어지고, "네!"라는 짧은 답변이나 OK 손가락 이모지로 승인 절차가 완료된다. 요청글 아래 댓글로 데이터를 제공받는다. 개인정보 등 민감한 데이터는 ‘완료’ 이모지와 함께 ‘개인멜로 보냈습니다’라는 댓글이 달려 있다. 당황스러웠다. 떰즈업, 체크박스, 두 개의 눈알 이모지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슬랙창을 보며 회사 일이 장난인가?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래도 됐다. 슬랙을 통한 요청은 공개적인 대시(dash)이다. 모두에게 오픈해도 무방할 만큼 투명한 이 요청과 승인 절차는 자신감과 책임감이 충만한 스타트업 업무 방식이다.
적당히 나댈 것
결국, 선을 어떻게 다루는가의 문제
어릴 때부터 우린 선을 긋는데 익숙해져 있다. 색칠공부를 할 때 선 밖으로 크레파스가 튀어나가지 않도록 안감힘을 쓰며 색을 채웠고, 실수로 선을 넘긴 새 지우개를 신사협정 운운하며 얄밉게 가져간 짝도 있었다. 어엿한 회사원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초등학생 때보다 더 치열하게 '이건 내 일, 저건 네 일'하며 조직도를 기반해 업무분장표를 세세히 써내려 간다. 대기업에서는 업무 쳐내기가 팀원이 바라는 팀장의 덕목 중 하나다. 쳐내기 경쟁 끝에 터덜터덜 신규 업무를 받아 들고 오는 팀장을 바라보는 팀원들의 눈에 패배자를 향한 원망과 실망, 안쓰럼이 뒤섞인다.
물론 업무의 명확한 경계는 혼란을 방지하고 효율을 높인다. 그러나 스타트업에서는 성장의 방해선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일을 하다 보면 경계가 모호한 일이 많고 담당자가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일이 오락실 게임의 두더지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이때 필요한 건 '이 건 내 일이 아니에요'하고 방어선을 쌓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해볼게요' 하며 용기 있게 나서는 거다.
나는 B에 재무담당자로서 입사했다. B 퇴사 후, 내 이력서를 분석한 AI가 나를 이렇게 평했다. 재무, 인사, 총무, 비즈니스 업무를 망라해 경영지원 전반에 능한 경력자. 그레이 영역의 업무를 끌어안아 커리어로 만들어 낸 과거의 관대하고 열정 넘쳤던 내 덕이다. 여기서 유념할 단어는 '적당히'다. 누가 봐도 적임자 혹은 주인이 있는 업무를 무턱대고 가져오는 건 침범이자 전사적 손실이다. 스타트업에서 경계를 허문다는 건 모든 일을 다 떠안는다는 게 아니라 공백이 생겼을 때 기꺼이 경계 밖으로 손을 내미는 걸 뜻한다. 언제든 도움을 줄 준비는 하고 있되 무분별한 열정 폭주로 나대지 말 것.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뚜렷이 구분할 것. 이 미묘한 균형감과 타이밍을 읽어내는 사람이 스타트업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