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자율성
슬랙이라는 허브 혹은 지옥
이전에 잠깐 언급했지만 이번 글에서 슬랙에 대해 더 얘기해보려 한다.
B 스타트업에 있을 때였다. 헤드헌터를 통해 고강도 업무로 악명이 높은 금융 플랫폼 T 재직자의 이력서를 받았다. 회원 수 1천만 명이 훌쩍 넘는 T에 비하면 B는 이제 막 시작한, 시장에서 이름조차 생소한 기업이었기에 구직자의 이력서를 보자마자 웬 횡재야, 얼씨구나 반기며 면접을 요청했다.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가 인상적인 구직자 J에게 한 가지 맘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생기의 부재였다. 깊은 다크서클과 침울한 회색 분위기가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지금 근무환경이 많이 힘드냐는 물음에 그는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그렇다 했다. 그리고 주저하다 이렇게 물었다. "혹시... 여기도 슬랙 지옥인가요?"
한 달이 지나고 입사한 그를 몰라볼 뻔 했다. 아, 원래 밝은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슬랙 지옥을 걱정하던 그가 가장 선봉에서 슬랙 도입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슬랙이 뭐길래.
2013년 8월, '검색 가능한 모든 대화와 지식의 로그(Searchable Log of All Conversation and Knowledge)'의 약자인 '슬랙(Slack)'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이 메신저는 본디 타이니 스펙이라는 미국의 게임 스타트업의 내부 개발용 협업툴이다. 메인 비즈니스인 게임은 망했지만 곧 세상을 바꿀 '슬랙'이 남았다. 2014년 정식 출시 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이 메신저를, 2021년 세일즈포스가 약 277억 달러, 그러니까 한화로 약 30조 원의 가격으로 인수했다.
이제 스타트업뿐 아니라 대기업까지 슬랙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22년 롯데온이 '우리는 slack에서 출근, slack에서 퇴근!'이라는 슬로건을 도입했고 올리브영, 삼성엔지니어링, 심지어 2025년 7월 카카오마저 이 요물단지를 사내 메신저로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슬랙의 장점은 명확하다. 슬랙에서 공식적으로 홍보하는 바와 같이 슬랙은 이메일이 갖고 있는 단순한 일방향 정보 전달 기능이 아니라 실시간 대화와 협업을 통해 의사 결정 속도와 투명성, 자율성을 높인다.
슬랙은 채널 기반의 대화 시스템이다. #을 달고 시작하는 온갖 채널은 프로젝트, 팀, 주제별로 공개/비공개로 개설 가능하며 정보는 채널 안에 차곡차곡 누적되어 보관된다. 공개된 채널이라면 누구라도 손쉽게 관련 정보 검색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규 입사자도 그간의 히스토리를 거슬러 올라가 업무의 맥을 쉽게 잡을 수 있다. 구글창에 검색하듯 궁금한 정보의 단어 OOO을 넣고 검색하면 된다. 그럼 OOO 키워드가 들어간 대화, 파일 등 조직 내에서 그동안 축적한 모든 정보를 한 번에 알 수 있다.
슬랙은 구글, 노션, 지라 등 여러 업무 앱과 연동되어 업무 툴의 허브 역할도 한다. 이모지를 통한 실시간 응원과 격려, 농담 등의 정서적 반응이 가능한 구조 또한 스타트업의 조직문화와 잘 어울린다.
단점도 있다. 늘어나는 채널과 끊임없는 알림으로 피로가 과중되고 오히려 집중력이 하락하는 경우, 상명하복이 익숙한 조직에서 섣불리 도입했다 DM과 비공개 채널만 활성화되는 경우, 개인정보 등 민감한 정보를 실수라도 공개채널에 노출하는 데이터 보안 이슈 등이다.
슬랙에 공유된 정보를 못 봤다면, 그래서 몰랐다면, 그건 모두 내 책임이다. 중요한 정보를 놓치면 안 된다는 혹은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자려고 누운 침대에서도, 휴가 중에도 띠딩, 슬랙 알림 소리를 환청처럼 듣기도 한다. '슬랙에서 출근, 슬랙에서 퇴근'이라는 슬로건은 어디서든 근무가 가능하다는 유연함을 상징할 수도 있고, 슬랙 지옥으로의 초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슬랙이 가진 강력한 힘 때문에 J가 다시 지옥문을 열고자 하지 않았을까.
다중역할자의 하루
대표이사, 마케팅, 경영기획, 상품운영 담당자가 회사의 메인 프로젝트 미팅을 하고 있다. 회사는 2주마다 신규 프로젝트를 노출하고 회원을 모은다. 15분 만에 퀵 미팅이 끝나고 마케터와 상품운영 담당자가 남는다. 그리고 IT개발자가 회의실로 들어온다. 이번엔 CS 정기 아이디어 미팅이다. 30분 후, 동일한 회의실에 상품운영 담당자와 외부 고객사가 앉아 있다.
스타트업에서는 조직도의 정규 조직 외에도 사이드 프로젝트를 위한 임시 팀이 수시로 생겨났다 사라진다. 서로 얽히고설켜 몇 명 되지 않는 조직 내에서 다양한 팀 빌딩이 만들어진다. 워크샵 TF, 스터디 소모임, 컬처 TF 등 메인 업무 외 활동 또한 다양하다. 필요하다면 팀을 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데 주저하거나 눈치 보면 안 된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여건이 되는 한 서로 도우려고 하고 돕기 어려운 상황이면 어렵다고 어렵지 않게 얘기하는 곳이 스타트업이다.
대기업에선 편안히 자식 역할만 했던 내가 이제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 학부모, 외숙모 역할을 동시다발적으로 맡게 되며 하루 종일 회의실을 탈출하지 못하는 날도 생긴다. 바빠서 화장실도 미루고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스타트업에 하루 바삐 분신술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렇게 동시에 여러 자리에 몸을 담그며 깨달은 바가 있다. 작은 조직 내에서 한 사람의 맨파워는 여기저기 강력하게 뻗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분신이란 초능력까진 아니더라도 멀티 플레이에 익숙해지고 능력치도 상승한다.
결정받지 말고 제안하기
이건 비단 스타트업에서만의 얘긴 아니다. 담당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 태도다. 가정해 보자. 직면한 과제가 있다. 진행하려면 1~3안 중 택해야 하고, 대표의 컨펌 후 실행이 가능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언제나 그렇듯 스피드, 그리고 근거가 뒷받침된 의견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 대표는 신규 비즈니스 개발과 테스트, 투자유치 때문에 숨 가쁘게 움직인다. 사무실에선 손 닿을 듯 가까이 있더라도 늘 일정이 빽빽해 독점이 어렵다. 때문에 대표에게 보고할 때 동일한 건으로 재미팅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심신에 좋다.
보고의 기본은 이렇다. "이 일의 배경은 이렇고,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뭐이며, 기한은 언제까지입니다. 1~3안이 있으며 블라블라 이러한 이유로 저는 1안을 추천합니다. 만약 1안을 선택하신다면 다음 단계는 이렇게 진행하고자 합니다. "
이렇게 한 번의 보고 안에 상황 설명과 의견 개진, 대표의 컨펌 유도까지 모두 담아낸다. 요즘은 챗GPT도 맞든 틀리든 제 의견을 낸다. '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결정을 해주세요.' 결정만 기다리는 태도로 스타트업에 남을 수 없다. 그런 직원을 좋게 평가하는 스타트업 대표 역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