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에 출몰한 정치가

활약이냐 몰락이냐

by 혜진

기업 리뷰에서 정치의 냄새가 난다

구직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매일 채용 플랫폼 네 곳을 순회한다. 전통의 강자인 J와 S, 스타트업 채용 기반으로 성장해 상장에 성공한 W, 명함관리 앱을 BM으로 시작한 R사까지. 중복 공고도 많지만 특정 플랫폼에만 등장하는 공고도 있다. 좋은 자리 놓칠세라 여기저기 부지런히 눈품을 팔아본다.


채용시장엔 16년 차가 지원할만한 적당히 무거운 자리가 그다지 많지 않다. ‘여기 어쩌면 괜찮을지도'라는 가녀린 기대감이 들면 바로 기업리뷰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평점 3점 미만이면 다시 공고 탐색으로, 3점 이상이면 전·현직자 리뷰로 넘어간다.


‘고인물', '사내 정치질의 향연', '무능한 대표와 경영진', ‘철천지 원수라도 말릴 회사’, ‘신고 후 검토 결과, 게시 중단된 게시물입니다'. 이런, 다들 화가 많이 나 있다. 리뷰의 모수가 작고 기업에서 신고해 게시 중단이 많은 곳의 평점은 대개 조작된 가짜다. 들썩이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슬그머니 지원을 보류 내지 포기한다.


가장 불길한 단어는 ‘사내 정치'다. 정치가와 함께 일하는 건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 물론 정치가가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니다. 꽤 유능할 수도, 언젠가 도움 받을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피로감이 동반된다. 때문에 단 몇 건의 사내정치 부정 리뷰만으로도 입사지원 의지가 즉각 휘발된다.


조직(사내) 정치의 정의는 이렇다. '공식적인 권한 체계를 우회하거나 보완하여 개인 혹은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행동'. 모두가 동의한 규정이나 절차를 무시하고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이 모이는 조직이라면 조직의 크기가 크든 작든 정치력이 자라나게 마련이다. 여섯 살 딸이 하원 후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모습을 삼십 분만 지켜봐도 그네 쟁취를 위한 부탁과 애교, 눈물의 술수 등 아이들에게도 정치 세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놀이터에도 유치원에도 있는 정치인이, 아무리 규모가 작다 해도 성인들이 다니는 회사인데 없을라구. 당연히 있다. 아주 많다.


대기업 사내정치는 스타트업의 그것보다 안온하다. 목적은 대부분 개인의 안위에 편중되어 있다. 고과, 승진, 자리 지키기, 손해 보거나 티 안나는 일은 털어내고 돋보이고 손쉬운 일은 잽싸게 쟁취하기 위함이다. 묵묵히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 정치력을 장착하기엔 에너지가 부족한 다수의 사람들 틈에 이런 정치꾼이 몇 낀다 한들, 조직의 큰 바퀴는 길을 이탈하지 않는다. 비록 누군가의 눈꼴을 시리게 하고 노동 의욕을 상실하게 할 수도 있지만 회사의 존립을 위협할만한 힘은 없다. 한 번에 두 세 단계를 건너뛰는 모습을 옆에서 봐도 눈 딱 감고 무시하면 그뿐, 사실 땀내나게 종종거린 그가 돌려받는 보상도 어찌 보면 크지 않다. 그래서 대기업의 정치는 평화롭다.


스타트업의 사내정치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바람이 한쪽으로 잘못 불기 시작하면 금세 금이 가고 곧 틈을 따라 파사삭 얇은 벽이 깨져 내린다. 자금과 인프라가 없는 곳이라면 완전한 붕괴까지 채 일 년이 걸리지 않는다.


왜곡된 신념과 영향력의 중독

스타트업의 정치는 대개 영향력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정치가는 의사 결정의 주도권을 쥐고, 대표를 비롯한 핵심 경영진과의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려 한다. 정치가가 이미 C-level일 경우, 주요 타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표다.

스타트업은 역할이 불분명하고 경험자가 부족하다. 이 틈을 타 역량과 무관한 누군가 프로젝트나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게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한다. 어떤 이는 해보지 않은 일이라도 잘할 수 있고, 어떤 이는 해본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핵심은 누가 그 차이를 간파하느냐이다. 이는 대표에게 꼭 필요한 역량이지만 의외로 그 감각을 갖추지 못한 리더가 많다.


상황으로 예를 들어볼까 한다.

회사 P는 기존 BM에 대한 실적 저조로 피보팅을 시도한다. 기존 BM을 1, 새로운 BM을 2라고 부르기로 하자. BM 1을 유지하며 BM 2를 테스트하기로 했다. BM 2는 구조화되어 상품, 마케팅, 서비스 기획을 총괄할 사람이 필요했다. 해서 외부 채용 대신 내부의 누군가가 그 임무를 맡게 된다.

그는 본디 BM 1의 서비스 기획 책임자였다. 책임을 맡기 몇 달 전엔 서비스와 IT를 이어주는 PM이었다. 서비스 기획 경력이 없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역할을 맡게 됐다. 단기간에 PM 담당자에서 서비스 기획 책임자로, 이번엔 BM 2에 대한 총책임자가 된 셈이었다. 영향력이 넓어지자 겸손했던 그의 눈빛이나 태도가 자신감 넘치게 바뀌었고 외부 미팅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걸 즐기게 됐다. 이런 게 영향력 중독에 따른 도파민인가.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으면 용납할 수 없었다. 설득이든, 압박이든, 질리게 하든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결국 의견을 관철시켰다.

단기간의 성과가 있었다. 몇 차례 고비용 이벤트를 통해 회원 수가 증가했다. 하지만 장기적 가치는 만들지 못했다. 신규 회원들은 이벤트 활동 외엔 특별한 활동 없이 1년이 지나 휴면 회원이 되었고, BM 2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늘어난 회사의 인력과 비용이 자금을 무섭게 잡아먹기 시작했다. 일부 직원과 대표는 BM 2 프로젝트를 전면 재검토 요청했다. 그 후, BM 2의 책임자는 회사 밖에서 대표와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 희한하게도 며칠 후 BM 2의 신규 인력채용이 시작됐고 신규 이벤트와 상품 출시 라인업이 발표됐다. 몇 번의 이런 패턴이 반복되었고, 이듬해에 회사 P는 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BM 2의 책임자는 여전히 자신이 옳았다고 믿는다. "최선을 다했고, 사심은 없었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할수록 회사는 어려워졌다. 잘못된 신념과 영향력에 대한 욕망이 한 스타트업을 흔들었다. 물론, 비단 한 명 때문에 회사가 파멸했다 단정할 순 없다. 담당자의 부족한 혜안, 정치를 묵인하는 리더, 팀원의 방어적 무지와 냉소적 방관, 누군가의 강력한 권력욕이 맞물렸을 때, 스타트업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정치가 늘 나쁜가

따뜻하고 선한 정치도 있다. 영화 '인턴'에 등장하는 벤(로버트 드 니로)은 패션 스타트업의 70대 시니어 인턴이다. 벤은 은퇴 전에 의류나 패션과 전혀 무관한 일을 해왔다. 그는 완벽한 정치가다. 인턴 주제에 CEO와 긴밀하게 비공식적 정보를 주고받고 부여받은 역할을 넘어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중재를 하고, 팀의 효율을 높인다. 이렇게 정치가 누가 봐도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스타트업엔 벤처럼 필요할 때 설득하고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위험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정치는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달라진다. 스타트업에서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적 상황을 인지하고, 적절히 대응하며, 올바른 영향력을 행사할 줄 아는 능력이 필수다. 정치에 휘말렸다는 생각이 든다면 바로 나를 돌아봐야 한다. 맹세코 사심이 없는지, 팀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숫자가 성장하고 있는지, 넓고 멀리 그리고 크게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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