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산팔육 Dec 05. 2019

김 형


비극은, 때때로 우리가 너무나 쉽게 정직하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그날, 토익 점수가 있냐고 팀장이 말했을 때, 나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착각하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팀장은 무척 잘됐다고, 그럼 나를 회사에서 보내주는 단기 홍콩 연수에 천거하겠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회사의 모든 해외 연수는 근래의 토익 점수가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날, 팀장에게 점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그 모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향한 호의에 나보다 기뻐하는 팀장 앞에서 나는 그 계획을 만류할 수 없었다. 나는 사실 개인주의자요, 직장에서 벌어지는 회식이며 워크숍이 업무보다 힘들며, 그러니 일면식도 없는 타 부서원들을 만나야 하는 홍콩 연수보단 차라리 야근을 시켜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내가 기대할 수 있었던 건 연수란 것이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고 연수팀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팀장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와 연수팀장이 막역한 사이라며 걱정말라 하였다. 실제로 나는 낮은 연차에도 불구하고 팀장의 학연이 이끄는 대로 얼마 후 단기 홍콩 연수 당선자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내게는 익숙한 레퍼토리지만, 사람들의 축하와 나의 말 못 할 스트레스가 공존하는 며칠 후, 나는 연수팀장이 인솔하는 열다섯 명의 타 부서원들과 함께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를 비극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왜냐면 이 글은 그 연수팀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연수팀장은 회사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여 나도 몇 번은 들어본 사람이었다. 그가 회사의 네임드가 된 것은 업무보다 의전에 능했고 또 그 의전의 양태가 독특했기 때문인데, 회장의 지점 순시에 맞춰 직원들에게 대형 플래카드를 걸게 한 일화는, 당시 회장의 언짢은 표정과 함께 지금껏 회자가 되고 있다.


아무튼 그는 처음 만난 열다섯 명을 모아놓고 자기소개를 하자고 했다. 그 원칙 또한 독특했는데, 일 인당 십분을 넘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열다섯 명이 십 분씩이면 족히 세 시간은 걸릴 텐데.. 도 그는 단호했다. 사람들이 당혹할 틈도 없이 본인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는데, 그 장편 서사를 듣고 나서야 우리는 그 시간이 연수팀장 본인을 위한 제안임을 알게 되었다.


연수팀장의 소개에서 기억에 남는 건 그가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은, 어떤 마침표와 같았다. 그를 둘러싼 여러 풍문과 여흥을 강요하는 태도, 그리고 전국노래자랑이라는 과거사가 더해져 그의 본체가 마침내 완성되려는 순간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제 나의 스트레스는 일면부지 열다섯 명의 타 부서원들이 아니라, 이 흥 많은 전체주의자와의 일주일간 동행에 있었다.


그 일주일간, 나는 극강의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열다섯 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차악을 선택한 것인데 나는 그 안에서 처음으로 함께 싸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는데, 말인즉슨 연수팀장은 공식 일정이 끝나면 모두가 조를 이뤄 함께 관광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고른 조에 편승하였는데, 나는 전체주의자들의 기호에 익숙했기에 한 번도 같은 조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극은, 또한 언제나 한 번에 오는 법이다. 연수 마지막 날 팀장은 전체 회식을 제안했다. 특별히 한식집으로 예약을 시켰는데, 아마도 여흥이 길어질 것이라 다들 짐작했다. 그 정도쯤 되면 일주일간의 소회 발표와 건배사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고, 모두가 각자 준비한 레퍼토리를 세 시간에 걸쳐 낭독했다. 그렇게 한국식 회식의 향연이 홍콩의 밤을 수놓던 때 거나해진 팀장이 느닷없이 막내에게 노래를 시켰다. 노래는 노래일 테고, 막내는 나였다.


시대가 많이 바뀌어 요새는 노래방도 잘 가지 않는 분위기였다. 젊은 직원들의 볼멘소리에 공식 술자리도 아홉 시를 넘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그곳은 여의도가 아니라 홍콩의 침사추이였고, 아무리 한식집이지만 한국말을 쓰는 이는 우리밖에 없었다. 거기서 팀장이 건네는 소주병 마이크를 집어 들며 나는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졌다. 열다섯 명의 동정 가득한 눈빛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애국가를.. 아니, 윤도현 밴드의 <나비>를 불렀다.


가사를 외우지 못해 핸드폰을 훔치며 더듬더듬 완창하고 나자 팀장이 매우 흡족해하며 칭찬을 쏟아냈다. 나의 비극을 미리 예견한 듯한 그 유려한 격려사를 들으며 나는 이번 비극의 시작을 원망했다. 토익 점수를 묻던 팀장, 아니 토익 시험, 아니 애초에 이 회사에 들어온 것부터가 비극 같았다. 대학교 신입 오티 이후로 경험하는 압도적인 패배였다. 여기가 끝이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텐션이 올라간 팀장이 이번에는 모두가 돌아가며 노래를 하자고 제안했다. 여전히, 홍콩의 침사추이였다.


그때 나는 패닉에 휩싸인 군중의 얼굴을 보았다. 남녀노소와 직급을 가리지 않고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인 열다섯 개의 표정을 보았다.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니 분명 대학교 신입 오티 이후로 정말 오랜 시간 만에 찾아온 위기였을 것이다. 그때 동요하는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팀장이 꺼내든 논리는, 역시 경험해본 가장 압도적인 논리로서, 노래를 불러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노래를 불러야 그게 가능하다는 거는 송해도 납득하기 힘든 논리였다.


그러나 나는 또 보았다.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인 군중이 노래를 통해 하나 되어 가는 과정을. 그 압도적 논리의 무결성을. 그래서 그 공기, 그 소리, 어느 것 하나 잊지 못한다. "박 대리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해. 원래 더러워서 피하는 거잖아." 김 과장은 이적의 <다행이다>를. "팀장님 여기 와서 정말 처음 말씀드리지만, 이번은 다시 생각해주시죠." 송 차장은 임재범의 <비상>을. 나는 고참들이 패닉 속에서도 제 살길을 찾아 노력하는 모습과 노래가 끝난 후 쏟아지는 안도감이 짙은 동료애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았다.


이후 노래는 점점 더 고조되어 전국노래자랑의 레퍼토리로 이어졌고 마지막 열창이 끝나는 순간, 거짓말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손에 손을 잡고 형과 누나가 되어 남의 노래에 리듬을 타는 어글리코리안.. 아니, 전국민이 노래자랑을 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람들은 그 애틋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현장에서 모두 같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런 꿈 같은 광경에 김 팀장, 아니 이제 김 형은 내게 어깨동무를 한 채 우리 인연은 모두가 정년퇴직할 때까지라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나는 끝까지 정신을 부여잡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윤도현 밴드 <나비> 대신 플라워의 <축제>를 부를걸.



홍콩특별행정구 주룽반도 남단 침사추이의 김 형. 그는 소울과 바이브, 소주병에 퍼지는 선율과 화음으로 나의 개인주의 역사에 혼란을 안긴 최초의 형이었다.



그.후.

김 형의 논리에 유일한 흠결이 있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한시적이라는 데에 있었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우리가 복귀했을 때, 우리는 신속하게 헤어졌다. 보통은 그런 연수가 끝나면 하나의 기수가 되어 모임이 지속되는 법인데, 거짓말처럼 우리는 다시 모인 적이 없었다. 가끔 인사이동 시기가 되면 혹 김 팀장과 같은 부서가 아닌지 확인하게 된다는 소문만 몇 번 들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근래의 토익 점수 정도는 능히 인멸할 수 있는, 더 견고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회식과 워크숍을 두려워하며, 가끔 만나는 공동체주의자들에게서 김 형의 잔향을 맡으며, 그리고 비극은 절대 한 번만 오지 않는다는 예고를 감시하며,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나는 좋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