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남주는 ‘82년생 김지영’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맘충’이라는 단어를 접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일반적인 통과의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과 출산을 이유로 ‘벌레’라는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충이라는 말을 낯모를 타인에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는 자신 역시 맘충에게서 자랐거나 그 아내 역시 맘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지난 10월 23일 개봉한 동명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김도영 감독은 소설 속 김지영에게 더 적극적인 목소리를 부여하고 싶었나 보다. ‘맘충’이라는 비하에 속으로 삼켰던 말을 남편에게만 토로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과 달리 영화에서의 김지영은 보다 당당하다. 커피를 쏟는 그에게 비하의 말을 던진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나선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그들에게 김지영은 따져 묻는다.
“왜 다른 사람 상처 주려고 애쓰는 건데요.”
깊은 이해 없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손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와 타인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과 해가 되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생존의 확률이 높아진다. 법과 제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만인에 대한 투쟁은 인류 역사상 끔직한 일들을 만들어 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한계가 뚜렷한 인간 본성과 법 체계의 빈틈을 매우기 위해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고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감응할 수 있다면 더 이상 타인은 나와 관계없는 불명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민과 공감의 능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 마르셸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불행한 사람은 도덕적이 된다”고 말했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불행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철학자 레비나스는 인간의 자아가 타자에 대한 도움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타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존재는 진정한 나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공감이든 불행을 전제로 한 공감이든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어찌됐든 일상에서 도움의 실천은 고도의 윤리의식을 갖춰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민과 공감 그리고 실천적인 도움이 요원한 일이라면 남은 답은 상상력뿐이다.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곤란과 어려움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타자를 판단할 때 우리는 잔인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된다.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 낡고 허름한 철거예정지의 보도 위에 앉은 노인을 보는 사람들은 그의 과거를 상상하지 못한다. 절름거리며 걸어가는 노숙자를 바라보며 우리는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광도 없었을 것이라 쉽게 단정한다.
여성 및 소수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 혹은 지배계급이 타인의 문제를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묵살시킨다면 타인들과의 조화로운 삶은 불가능하다. 물론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공감의 의지를 가지는 일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반대로 타자가 개인의 자유를 지키려는 행동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혹은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자들은 대답해야만 한다. 상처입은 타인이 당신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