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하는지 딱 보면 안다고?

by melange

집에서 나갈까 말까... 아침을 먹으면서도 먹고 난 후에도 속으로 계속 고민을 했다. 남은 휴가를 다 쓰라는 회사의 안내에 약 2주간 집에 있는 남편 때문이었다. 이번 주 안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글과 서평쓰기가 있는데...


사실 남편이 집에 있다고 크게 뭘 해야하는 건 아니다. 특별히 같이 뭘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좋아하는 분야가 극과 극이다. '책과 아날로그한 것을 좋아하는 나''영상과 디지털한 것을 즐기는 남편'.


둘이 같이 집에 있어도 우리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각자도생 스타일이다. 같이 뭔가를 하려고 하면 서로 스트레스 받음을 알기에 ‘내버려두는 미덕’을 발휘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둘만 남은 오전은 대체로 이런 형태다. 각자 방에서 또는 거실에서 하고 싶은 걸 하다가, 밥 뭐 먹을까 하며 대충 집에 있는 걸 챙겨먹고 또 각자 원하는 걸 하는 스타일.



:: 알맞은 사람? 적합한 파트너!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높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결혼하기 전, 나의 막연한 이상형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떤 얘기라도 다 꺼낼 수 있고, 뭐든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 함께 있으면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람. 그런데, 나의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분을 맞춰주는 이야기는 커녕 일상의 이야기도 단답형으로 말하는 사람이며, 회사에서도 로봇처럼 일처리를 한다는 평을 듣는, 그야말로 초절정 이과형의 공대생이었다.


무슨 얘기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이상형이라고 생각해왔다면서 대체 어쩌다 그 가장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이십대의 그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과 10년 넘게 살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이 사람과 나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내게 '알맞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때에 우리는 많이 싸웠던 것 같다. 티키타카가 잘 맞지 않아서, 대화가 계속 이어지지 않아서 그에게 툴툴거렸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오던 어느 순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서로 다른 취향인 것이, 각자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이 얼마나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같이 뭘 하자고 맞추고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나의 소중한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된다. 가장 자연스럽고 알찬 방식으로 각자의 시간을 채워가며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었다.



:: 너.무.나.도. 신경쓰이잖아


우리 부부가 함께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글을 써야했다. 서평 리뷰와 브런치 북 마감이 이번주다. 다른 건 몰라도, 글쓰기 할 때만큼은 철저하게 혼자여야 글이 써졌다. 아무리 각자의 시간을 터치하지 않는다 해도, 미안하게도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경이 쓰였다. 이 남자의 덩치는 좀 커야 말이지. 안 보일래야 안 보일수가 없잖아.


물론, 우리집이 원룸은 아니니까, 아이들 방이든 알파룸이든 어딘가 들어가서 콕 쳐박혀 쓸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의 작가지망생들이 그러하듯, 몰래 일단 써보는 중.


평소 내가 글을 쓰는 시간은 아이들과 남편이 출근한 오전 시간. 그랬는데, 이 남자가 집에 있으니 너.무.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대놓고, 나 글 써야하니까 방해하지 말아줘, 라는 선언도 못하고 그냥 책 보는 척, 인터넷 서칭하는 척 하고 있는데, 어슬렁 어슬렁 왔다갔다 하기만 해도 나는 빠직, 이마 한쪽으로 불이 켜졌다.



며칠은 그냥 참았다. 그냥 좀 쓰다 말고 덮기도 하고, 남편이 외출한 시간에 몰입해서 후다닥 쓰기도 하고... 그러나 두 개의 마감을 앞둔 이번주에는 도저히 안되겠다. 어제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 한다며 빌린 책을 모두 챙겨나와서 반납 후 3시간쯤 앉아서 읽은 책을 정리하고, 글을 쓰고 들어갔다. 뭐했냐는 남편의 질문에 대충 얼버무린다. “그냥 책 읽은 거 정리해야해서 그거 쓰고, 책 찾아보고 그러다 왔지.”



:: 딱 보면 안다고?


오늘은 어떻게 할까.. 아침을 먹고난 후 속으로 생각하다 오늘도 나가기로 결심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집 안에서는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서평쓰기는 마감날짜를 지켜야하고 대단한 기획을 세우고 시작한 글쓰기는 아니었지만 쓰다보니 지금껏 쓴 것이 아까워 제출이라도 해보자는 것이 내 목표니까. 아무말없이 일어나 다 먹은 그릇들을 정리해서 식기세척기에 넣고 있는데, 남편이 와서 묻는다.


"오늘도 나갈 거지?"

"어? 응응. 근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 나 아무말도 안했는데?"

"딱 보면 알지. 이 분이 나갈 거구나."


아니, 나는 정말 아무런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아침을 먹고 난 후 바로 일어나지 않고, 핸드폰으로 뉴스를 좀 훑어봤고, 그러면서 아무래도 오늘 나가서 조금이라도 쓰고 오는 게 낫겠다 결정내린 후, 그냥 일어나서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었을 뿐이었다.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에도 똑같이 하던 행동들인데, 왜 나갈 거라고 이미 단정짓고 있었을까?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아니, 나는 그냥 그릇정리하고 있었을 뿐인데, 평소랑 다를 거 없이 아무 말도 안했는데, 근데 어떻게 알지?"


그는 내 머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척 하면 알지. 결혼한지 10년이 넘었는데... 다 알긴 알지."


그도 나를 딱 보면 안다지만, 나도 알 것 같다. '다 알긴 알지' 다음에 숨겨진, 그가 차마 꺼내지 않은 그 뒷말.


"다 알긴 알지만, 내 몸의 편안을 위해 먼저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뒷말이 숨어있군."

"ㅋㅋㅋ 그치. 어떻게 알았지?"




:: 그럼 이것도 알아?


그들은 함께 이뤄온 것에 황홀한 충성심을 느낀다. 다투게 되고 화나고 웃음 나고 어리석고 아름다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틀림없이 그들만의 것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기까지 온 것,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노력하고 그때마다 새로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결혼 생활을 지켜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서로 알아채고 웃으며 마무리된 오늘의 아침.


'그럼 내가 브런치에 글 쓰고 있는 것도 알아?' 라고 물어보려다가 그건 참았다. 나의 글에 아직은 자신이 없으므로 타인의 시선까지 신경쓰면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그의 대답이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일단 '이 분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알 것 같고, 틈틈히 핸드폰에 뜨는 브런치에서 오는 알림으로 대강 감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가 알지도 몰라'와 '그가 알고 있다'는 이제 겨우 글을 쓰기 시작한 나에게 다가오는 체감이 다르므로, 일단 더이상은 묻지 않기로 한다.


글을 쓰고 나서는 가까운 지인에게 보여주어 정확한 욕을 먹으며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는데, 그것마저도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던데, 아직은 안되겠다. 나는 이제 막 땅 속에서 떡잎 한 장 꺼내올린 나의 작은 새싹을 좀 더 보호해야 하니까.


그렇게 도서관으로 나와서, 원래 쓰려고 마음 먹었던 글, 써야하는 글은 안 쓰고 새로운 글 하나를 써내려가고 말았다. 집안에서 어슬렁거리는 그가 너무나 신경쓰인다고 했지만, 그 덕분에 에피소드 하나가 생겨났다. 이렇게 도움을 줄 때도 있긴 하네? 풉. 어쨌건 오늘도 글 한 개 쓰기는 썼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영문 제목은 ‘The Course of Love, 사랑의 코스’ 이다. 낭만적인 줄만 알았던 연애와 결혼 -> 아이가 생긴 후 달라진 생활과 부부 간의 입장 차이 -> 외도 -> 부부상담까지.. 개별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작가는 이 과정들이 낭만적 연애 후 결혼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을, 일종의 코스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결혼했습니다’에서 시작해서, 아름답지만은 않은 결혼생활의 속사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입장을 읽어가며 독자는 때로 라비가 되었다가 때로는 커스틴이 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이들이 싸우는 이유와 예술과 미디어에서 만들어온 낭만주의가 결혼생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 혹은 결혼한 부부들에게 한번쯤 권하고 싶은 책.






keyword
팔로워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