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했던 계획이 현실로, 일본 나오시마
'섬 전체가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예술작품으로 가득한,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관'이라는 말은 얼마나 낭만적인 이야기인가. 심지어 그 섬이 쓰레기 섬에서 환골탈태한 거라면 더더욱 궁금해진다.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는 이런 프로젝트를 어떻게 계획하고 실행하게 된 거지?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 같은 이 섬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 역시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본의 나오시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금속제련업의 산업폐기물로 버려진 섬이었다고 한다. 공장에서 배출된 유독가스로 섬의 수목 대부분이 시들어 죽어가는 거의 민둥산의 수준.
그랬던 섬을 바꾼 건 베네세 그룹의 후쿠타케 소이치로 회장이었다. 후쿠타케 회장은 나오시마를 바다와 예술, 건축이 하나로 결합된 예술의 섬으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결심을 하고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기업 스스로가 문화와 지역 발전에 힘써 좋은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후쿠타케 회장의 '공익 자본주의' 이념을 현실화한 곳이 바로 예술의 섬, 나오시마.
일본 나오시마에 가게 되었을 때, 그래서 조금 많이 설렜다. 이렇게 멋진 경영이념을 가진 분의 자본과 계획, 그리고 예술가들의 의지가 함께 만나 예술의 섬으로 되살아난 곳. 이 프로젝트에 나도 한 발 디딜 수 있다는 점이.
나오시마는 일본 시코쿠의 다카마츠항에서 약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도착한다. 다카마츠 시내에 묵고 있던 나와 친구는 둘 다 나오시마에 대한 기대치가 한 가득이었기 때문에 아침 8시 첫 배를 타기 위해 일찍부터 부지런히 준비했다. 그러나 제 시간 보다 늦게 도착한 버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부두까지 뛰어서야 나오시마행 페리에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배를 타서 그런가, 배를 처음 타는 어린 아이 마냥 잠시 흥분했나 싶었는데 나오시마에 도착했다. 예술의 섬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나오시마의 미야노우라 항구에서는 벌써부터 귀요미 작품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호세 데 기마랑이스 José de Guimarães의 <해피 스네이크 Happy Snake>.
낚시대처럼 긴 장대의 끝에 달린 둥근 공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대롱대롱 매달려 춤을 추고 있는 이 귀여움이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동동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에 '해피 스네이크' 라는 작품명은 참으로 찰떡같이 어울린다. 저절로 띄게되는 미소. 이 작품을 보고 해피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미야노우라 항구에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볼 유명한 작품이 또 있다. 바로 쿠사마 야요이 Kusama Yayoi의 <빨강 호박 Red Pumpkin>. 야성적이고 유머러스한 분위기 때문에 호박이 좋다고 했다는 쿠사마 야요이는 불우한 성장기로 인해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어느 날 꽃무늬 식탁보를 보고 난 후의 잔상이 물방울 무늬로 남아 온 집안이 물방울 무늬로 보이는 현상을 경험했던 그녀는 물방울 무늬를 테마로 평생의 작업을 하게 된다.
나오시마 미야노우라 항구에 있는 이 빨강 호박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중 가장 큰 호박으로 알려져있다. 나오시마에는 이 곳 말고도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 한 개 더 있다. 이른바, 노란 호박. 섬 안쪽에 위치한 노란 호박은 2021년 태풍으로 떠내려가 손상되었다고 하는데, 손상 관련 기사 후에 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이 호박은 아직 복구 중인가보다.
섬 안에서는 버스를 타고 다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항구 바로 앞의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기로 했다. 인적사항을 적고 자전거를 대여해서 첫 페달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그 선택이 탁월했음을 바로 직감했다. 솔솔 부는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그 햇살에 빛나는 넓게 펼쳐진 바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낮게 지어진 아기자기한 집들. 워낙 작고 아기자기한 섬이라 차를 타고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풍경들이 섬 곳곳에 펼쳐져 있다.
이 신나는 자전거 라이딩에 배경음악이 빠질 수 없지. 주머니를 뒤져 나온 비닐 봉지로 여행을 위해 신중하게 선택했던 음악들을 담아온 핸드폰을 자전거 바구니에 힘겹게 묶었다. 그리고 플레이 버튼. 핸드폰의 음량은 오직 두 명의 라이더에게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적당했고 우리는 그렇게 음악과 풍경과 바람을 다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 넓게 펼쳐진 바다를 비추는 아름다운 빛을 바라보며 달릴 때, 마침 들려온 음악은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OST의 <Quizas, Quizas, Quizas>. 리드미컬한 쿠바 음악과 함께한 자전거 라이딩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친구와 함께 꼽아본 베스트 3 중 하나였다.
이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우리가 간과했던 점이 하나 있었다면, 나오시마 섬이 경사 굴곡이 많은 섬이라는 점. 오르막길에서는 힘들어서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자전거 대여점에 전동 자전거와 일반 자전거를 선택할 수 있더라니...
물론, 그 마저도 이 멋진 섬의 풍경을 더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라고 생각하지만, 다음에 또 나오시마에 가게 된다면, 그 때는 전동 자전거를 빌릴 거다!! ㅋ
한적한 나오시마의 마을은 아담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높지 않은 민가에서 정겨움이 느껴졌다. 건물들의 층고가 높지 않은 덕분에 파란 하늘을 한껏 볼 수 있고, 야트막한 뒷산과 하늘, 소박한 사람 내음이 어우러진 모습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띄어졌다.
골목을 벗어나 해안가로 고개를 돌리면 내가 굳이 더할 말이 없다. 탁 트인 시야 가득 넓게 펼쳐진 바다와 반짝이는 햇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우리는 이 섬의 자연을 만끽했다. 자전거를 타고 휙휙 달리다가도 한 눈에 마음을 빼앗긴 풍경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크게 숨 들이쉬고 내쉬며 감상하기. 느리게 천천히, 여유를 부려도 괜찮은 곳.
후쿠타케 회장도 아마 나오시마의 이 기분 좋은 햇살과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이 섬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죽어가기엔 이 바다와 햇살이 너무 아까워.
후쿠타케 회장의 나오시마 지원은 아버지가 서점을 운영하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본격적으로 예술의 섬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안도 다다오를 만나 함께 뜻을 나누었다. 사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안도 다다오는 솔직히 무리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후쿠타게 회장의 결심에, 죽어가는 섬을 예술과 자연이 하나로 결합한 문화의 섬으로 만들자는 그 웅대한 취지에 공감하여 이 프로젝트에 참가했다고 한다.
나오시마는 '국제 어린이 캠프장'을 시작으로, 자연과 예술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발상의 숙박형 미술관인 '베네세 하우스', 오래된 민가를 개조해 현대미술 작품으로 변화한 '이에 프로젝트', 빛이 테마가 된 땅 속의 미술관 '지추 미술관', 공간의 여백을 담은 '이우환 미술관' 등 굵직굵직한 미술관과 현대미술 작품들이 생겨났고, 이 프로젝트는 주변의 다른 섬까지 확장되었다.
꼭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섬 곳곳에 자리한 예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무심결에 가다보면 마주하는 작품들. 나오시마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들의 특징은 아티스트들이 직접 섬을 방문해서 만든, 나오시마에서만 볼 수 있는 '장소특정적 미술 Site-specific Work' 라는 점이다. 그야말로 예술이 녹아있는 섬이 되었고, 섬이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훌륭합니다. 여러분은 이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라는 식의 사고가 지금까지의 작품 관람법이었다면, 나는 보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다. 예술을 대중에게 되돌려준다, 즉 예술이 자기만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역사가 지닌 장점을 끄집어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을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단순한 감상을 넘어, 보는 이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 미술의 훌륭한 점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 /후쿠타케 소이치로, 안도 다다오 외 / p.11 서문>
그저 자전거를 타고 휙휙 달리다가 반짝이고 아기자기한 풍경 속에서, 또 천천히 걸어가다가 일상의 골목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들은 이제 이 곳 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삶의 모습이 되었다. 특별히 마음을 먹고 찾아가야만 만나는 예술이 아니라, 그저 일상에 녹아난 예술. 아마 이런 부분이 나오시마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죽어가던 섬은 이제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활기 넘치는 섬이 되었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나 역시 작가의 의도나 작품이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이해하고 감상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작품의 맥락이나 장소와 상관없이 항상 어딘가 실내에 갇힌 예술작품들만 보다가, 밝고 조용하고 정적인 이 곳에서 무심한 듯 어우러진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장면에 나도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더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현대 미술, 모르면 또 좀 어떤가.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때의 그 시간, 공기의 흐름, 남들과 달리 나만 발견한 작은 요소 등으로 내 마음이 충만해진 기억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또 예술을 감상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 같다.
죽어가는 섬을 예술의 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어쩌면 무모했을지도 모른다. 버려진 섬을 되살리겠다는 이 프로젝트에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필요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였던 계획을 세우고 자금력과 실행력까지 겸비해 이끌고 간 후쿠타케 회장에게 나는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안도 다다오도 이야기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한 이유도 그 웅대한 계획에 감복했기 때문이리라.
이 아름다운 나오시마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을 뿐이지만, 나는 조금 부러웠다. 이런 생각과 그것을 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음이.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공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이. 당장의 금전적인 이득에만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 만들어 간 아름다움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경제적인 효과까지 더불어 가져오게 되었으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다.
나오시마에서 시작된 아트 프로젝트는 주변의 테시마, 메기지마 등의 섬들까지 이어져 예술 축제를 벌인다. 세토내해 12개의 섬들과 다카마츠 항이 주된 무대인 세토우치 예술제는 3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트리엔날레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100만명이 넘게 다녀가는 축제가 되었고, 올해(2022년)는 4월 14일에 개막해 11월 6일까지 세 시즌에 나눠서 개최된다고 한다. 배를 타고 바다와 하늘이 어우러진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만끽하는 예술 축제라니... 듣기만해도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는 체험을 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직접 가서 봐야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지요. 주변에 이곳 섬 이야기를 들려주면 대부분 꽤 호기심이 동한다는 표정으로 바뀝니다. 특히 땅 속에 묻힌 미술관과 물방울 모양의 미술관 이야기에 이르면 도대체 공간이 어떻게 생겼다는 건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저는 '거기는 말이지, 가봐야 알아. 세상에서 본 적 없는 그런 공간이거든' 이라고 강조해 말합니다.
<나오시마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차현호, 아트북스, p.9 서문
나는 나오시마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 짧은 기억만으로도 이 예술제에 들르는 사람들이 힐링의 시간을 가지고 삶에 지쳐 텅 비었던 마음을 가득 채워돌아가리라는 걸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내가 그 때 나오시마에서 느꼈던 자연 속에서의 충만함, 행복,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여기 글로 열심히 담았지만, 사실 다 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술제에 다녀온 차현호 건축가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거기는 말이지, 가봐야 알아’.
나 역시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은 세토우치 예술제. 꼭 같이 가고 싶은 사람도 이미 점찍어두었다. 그들의 의사는 아직 묻지 않았지만.. ㅋ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예술제, 어쩌면 순례의 길이 될지도 모르는 번거로움과 인내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섬 한 곳만을 가보더라도 같이 가서 그저 아무 말 없이 풍경과 작품을 바라보고 싶다. 정적인 시간을 보내며, 한껏 마음이 채워지던 그 경험은 함께 해야 알 수 있으니까.
<함께 보면 좋을 책>
예술의 섬 나오시마 / 후쿠타케 소이치로, 안도 다다오 / 마로니에북스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직접 만들어 간 후쿠타케 소이치로 회장과 안도 다다오를 비롯한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책. 나오시마, 테시마, 이누지마의 미술관과 작품들의 설명도 함께 담고 있다.
나오시마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 차현호 / 아트북스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를 다녀온 건축가의 예술 여행 이야기. 작가는 이동하기도 시간 맞추기도 쉽지만은 않은 이 예술제의 경험을 '예술 순례'라고 표현한다. 작품에 담긴 이야기와 작가의 감상,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녹여낸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 예술 순례에 나도 동참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