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다 소용없다
"이번에 제주도에서 어땠어?" 라고 지인들이 물어보면, 나는 단박에 이렇게 대답한다.
"병원 투어 하고 왔어요."
떠나기 전날까지만 해도 이럴 줄은 몰랐더란 말이지. 하하.
제주도 내려오기 전 날 진단받았던 중이염 증상은,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서울 병원에서 처방해준 항생제를 먹고 있는데도 전혀 차도가 없고, 오히려 도착 날부터 이명 증상까지 나타나 더럭 겁이 났다. 물이 왼쪽 귀 가득히 차 있는 느낌에, 소리도 왼쪽으로는 거의 안들렸고, 왼쪽 코는 아주 꽉 막혀서 밤에 숨쉬기도 힘이 들었다. 억지로 코를 풀어보면 아주 끈적한 코가 나오곤 했고, 푼다 한들 곧장 차오르는 느낌 때문에 별 소용도 없었다.
도착한 다음날 찬바람을 쐰 딸도 곧바로 콧물이 터지고 기침을 해서, 초콜릿 박물관에만 들렀다가 무조건 병원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침 묵고 있던 숙소의 사장님이 아플 경우를 대비해 추천해준 병원이 있어 검색해보니, 정말 진료를 잘 보고 친절하단다. 그런데 대기가 어마어마 하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침에 전화를 걸어보니, 전화 예약은 당연히 안되고, 저녁7시까지 진료이지만 오후 4시까지는 와야 현장 예약 접수가 보장될 것 같단다. 또 다시 오마이... 나, 무사히 진료 받을 수 있을까?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지만 집을 나서서 운전대를 잡으니, 눈 앞의 풍경들이 나를 또 사로 잡았다. 서울에서는 운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였는데, 제주에서의 운전은 이상하리만치 즐거웠다. 아마도 달리면서 주변에 펼쳐지는 풍경이 계속해서 변했기 때문이리라. 도심 속에 있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도로에 귤 밭이 펼쳐지고, 다시 돌담길에 펼쳐졌다가, 갑자기 '와' 하고 감탄사가 나올 만큼 멋진 한라산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작년 9월에 남편과 꼭대기까지 올랐던 한라산. 지금은 정상에 눈까지 소복히 쌓여, 정말 그림같은 풍경이 되어주는 한라산. 어디를 달리든, 이 한라산이 배경이 되어주고, 지도가 되어주는 곳 제주도. 역시나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내 인생의 배경화면 중 하나.
초콜릿박물관은 예상보다 더 아이들이 좋아했다. 이미 초콜릿인 알갱이들을 냄비에 넣어 주걱으로 저으며 녹여주고, 그것을 짤주머니에 담아 모양틀에 부어 나만의 화이트, 갈색 초콜릿을 만드는 어찌보면 뻔하고 어찌보면 당연한 체험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내가 만든 초콜릿’이라는 뿌듯함이 베어있는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었나보다. 5살 둘째는 정말 재미있거나 정말 좋았거나 할 때 ‘아주’라는 말을 붙이는데, 오늘 나오며 그런다.
"오늘 초콜릿 만들기, 아주~ 좋았어."
그래, 그랬으면 됐다. 너희가 웃으니 나도 좋아-! 비록 엄마 몸이, 엄마 몸 같지 않지만 말이다. 하하.
그러고는 미리 검색해둔 고등어구이, 전복성게미역국집에 가서 이미 점심시간이 너무 지나 고플대로 고파진 배를 맛난 음식들로 달래주고, 어서 바삐 이비인후과로 떠났다. 4시까지 도착해야 안전빵이라니, 네비상 도착이 4시 50분인데. ㅜㅜ 전화해보니 아직 괜찮을 것 같다해서 제발제발을 외치며 부지런히 달려갔다. 마음속으로는 이 병원이 제발 괜찮은 병원이어서, 우리딸 콧물기침도 어서 잡고 이 꽉 막힌 느낌의 답답한 내 통증을 어서 좀 치료해주길 계속 바라면서 말이다.
도착하니, 다행히 접수가 가능했다. 서울 우리 동네에서 다니던 이비인후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의사선생님이 4분이나 계시는 아주 큰 병원이었다. 소문대로 사람들이 무척 많았는데, 40여 분 기다리니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부터 경쾌하고 친절한 선생님. 느낌이 좋았다.
딸은 나처럼 비염에, 목감기가 겹쳐 있는 상황이라 일단 무난한 약을 쓰며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였다. 선생님이 코 안에 현미경 겸 석션 기구를 집어넣고 한참을 보시더니, 아주 시원하게도 한~참이나 석션을 해주셨는데 (그만큼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나오는 콧물이렸다) 그러고나서 그러신다.
“엄마, 아주 안 좋네요. 엑스레이 좀 찍고 오시죠.”
그렇게 해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들른 병원에서 엑스레이까지 찍어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감사하게도 여행지에서 탈이 나 본 적이 없어서 외지 병원을 가 본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진짜 ‘여행’이 아니라 ‘살아보기’라서 그런지, 살아보기다운 경험을 한다고 순간 생각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있는 와중에도 선생님의 ‘안 좋네요’라는 말이 자꾸 생각나서 겁은 좀 낫지만 말이다. (여기, 우리 동네도 아니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도인데다가, 남편도 여기 없고, 애들 둘은 챙겨야하는데, 여행이 12일이나 남았는데 나 어떡하지-? ) 나, 병원은 많이 겪어봐서 강심장인데, 이거 치료 불가능한 병 그런건 아니겠지. ㅜㅜ
떨리는 마음을 안고 다시 진료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내 콧속 사진과 엑스레이 사진을 함께 보여주시며 아주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데, 한마디로 농이 왼쪽 코 옆을 가득 채우다못해 아래는 목, 위로는 눈 위까지 치고 올라갔고 이제 이마도 채우고 있단다. ㅜㅜ 아놔.... 한마디로 축농증. 어쩐지 왼쪽 몸이 며칠 전부터 전체적으로 안 좋고, 왼쪽 귀 뒤도 누르면 아프고, 이제는 왼쪽 눈썹위도 불편감이 들었는데, 그게 그 이유였다. 농이 가득차서 생긴 중이염이고, 원래 왼쪽 콧속 구조가 좋지 않은데 지금은 안이 더 퉁퉁 부어 있어 농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단다. 세상에. 나는 40평생 살면서 내 코 안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고, 좀 지저분하지만 농이 저렇게 전체 통로를 덮고 있는 것도 충격이었고, 최근 편도선염을 달고 살았던 것도 원래의 내가 코와 목이 안좋은 사람이어서였다는 것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이런 경우엔 통로가 워낙 좁은 거니 한두달 약을 먹어보고도 좋아지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한다고 하면서, 일단 약을 쎄~게 먹어보자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혹시나 해서 가져간 서울 병원의 약처방전을 보여드리니, ‘아이고, 이걸 먹었다구???’ 하신다. 헉, 충격. 이 증상엔 지금껏 먹고 있던 항생제는 이 증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약이었단다. 게다가 스테로이드제를 3일간 쎄게 써서 잡아야 하는데 그것도 없었으니 좋아질 리 없었다는 거다. 세상에, 나 오늘 여기 안왔으면 어찌 될 뻔 했어.... 서울 의사 말대로 7일 꼬박 그 약 먹고 (먹으면서도 속이 울렁거렸었는데..) 더 안좋아진 상태로 병원에 갔었을텐데... 참 아찔해지면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내가 제주도에서 '인생 의느님'을 만났구나.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아왔고 저녁을 먹자마자 먹어봤는데, 2시간이 경과한 10시경부터 처음으로 코가 뚫리기 시작했다. 무려 10일만에 양쪽 코로 숨을 쉬었다. (감동~) 제주에서 병원 가 본 것도 평범하지 아니한 경험인데, 또 감사하게도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내 콧속 구조에 대해서도 낱낱이 설명 듣다니. 여행 오기 전에는, 다음날 가 볼 곳들 착착 찾아 메모해두고 그 일정 부지런히 추진해야지! 이게 목표였는데, 여기서 속절없이 아프고 나니 겨우 여기까지 운전해 와 약 처방 받고, 그 다음 일정이 집에 들어가 애들 티비 틀어주고 나는 약 먹고 이불 덮고 한잠 자야하는 일정이라니, 아하~ 이게 바로 '여행'과 '살아보기'의 차이점이구나 싶었다. 그저 내가 살던 곳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 살다보면 아프기도 하고, 아프면 다른 일들 다 미루고 병원가고 약먹고 푹 쉬어야 하는 것, 그게 이 제주도라 해서 별반 다를 리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제주 살아보기 체험'을 온 몸으로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인데 괜찮겠냐며, 더군다나 10살 5살 애들 둘 데리고 독박 여행 괜찮겠냐며 많이들 걱정했었지만 '그냥 하면 되지 뭐!'라며 대책없이 추진한 건 나니까, 오롯이 결과를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누. ㅎㅎ 그래, 아프면 다 소용없는 법. 구경도 몸이 정상일 때에야 하는거지, 몸뚱아리의 반이 내 몸 같지가 않은데, 일단 한 시간만 자고 생각하자-!!!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