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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y 24. 2019

완두콩이 이렇게 달았었나?

5월, 완두잼과 완두버무리

떠올려보면 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콩 매니아였다. 학교 급식에서 콩밥이 나오면 다들 얼굴을 찌뿌렸지만, 나는 조용히 신이 났다. 당번에게 미리 말을 해두어야 한다. "밥 풀때 위에 콩만 걷어서 나 줘." 반에 두 세명 정도 되는 콩 매니아들이 그 콩들을 거두어 먹는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완두콩을 수확할 때다. 완두는 그 자체로도 단맛이 나지만, 설탕과 함께 졸이면 단맛이 응축된다. 말 그대로 단단하게 달다. 팥에 이어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곡물이다. 올해 처음으로 산 완두는 아주 싱싱해서, 껍질에 수분이 탱탱하게 차 있었다. 삶은 완두의 향을 느끼며 설탕과 두유와 함께 달큰하게 졸여 주었다.


완두콩잼
재료: 완두콩 150g, 두유 150g, 비정제설탕 75g, 한천가루 한 꼬집 (생략가능)


잼 만드는 건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고된 노동이다. 가스불 앞에서 쉬지 않고 잼을 저어주어야 한다. 뭐든 한 가지 일을 오래하는 건 어렵다. 더욱이 나처럼 마음이 쉽게 바뀌는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호기심이 많고 늘 새로운 일에 관심이 가서 한 가지 일을 끈기있게 해내려면 그것을 '정말 좋아해야 한다'. 적당히 좋아하는 것을 오래 하기에는 세상에는 재밌는 거, 새로운 거, 신기한 게 너무 많으니까.


완두콩을 삶다보면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시점이 있다. 부드럽게 익어간다는 뜻이다. 한두 알 꺼내어 먹어본다. 입에서 삶은 감자처럼 부스스 으깨지면 불을 끈다. 완두콩과 동일한 양의 두유를 붓는다. (우유도 가능하다) 믹서기에 넣고 갈아준다. 완두의 식감을 느끼고 싶다면 아주 곱게 갈지 않아도 된다. 나는 완벽하게 정제되기 전의 재료가 좋다. 100% 정제된 맛과 식감에서는 뭐랄까 그 재료 본래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이제 설탕을 넣어줄 타이밍! 설탕이 꽤 많이 들어간다. 잼이나 청을 만들 때 늘 멈칫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많은 설탕이 필요하다니. 난 꼭 이걸 만들어 먹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설탕을 줄이면 맛도 그렇지만 식감이나 모양, 보존기간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디저트를 만들 때 그렇다. 케이크를 구울 때 설탕의 양을 무리하게 줄이면 원하는 케이크의 모양과 식감이 나오지 않는다. 설탕은 단맛을 내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이 있다. 비정제설탕을 썼으니 그래도 조금은 낫겠지 위안을 삼는다.


이제 인내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마음을 비우고 명상을 하듯이 주걱으로 잼을 저어준다. 서서히 수분을 날려보낸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하면 잼은 바로 냄비 바닥에 눌어붙는다. 좀 되직한 젤리처럼 만들고 싶어서 한천가루를 더했다. 한천가루가 없어도 물론 잼을 만들 수 있다. 한참을 휘이휘이 저어주다 보면 잼의 성질이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주걱을 저을때 바닥을 가르는 길이 눈에 보인다. 잼이 묽을 때는 주걱이 지나는 길에 잼들이 곧바로 채워지지만, 잼의 수분이 어느 정도 날아가면 되직해져서 주걱이 지나는 길을 따라잡지 못한다. 잼은 식으면 따뜻할 때보다 더 되직해지니까 여기서 멈추어도 좋다.


완두콩잼은 과일잼과는 다른 단맛이 느껴진다. 과일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단맛을 내기 때문에 잼으로 만들면 화려해진다. 곡물잼은 본래 가지고 있는 수수한 단맛을 오랜시간 졸여서 응축시킨다. 처음 맛은 곡물 본연의 맛이 느껴지고 입에서 오물오물 넘기려 할 때 깊은 단맛이 올라온다. 과일잼보다 곡물잼을 좋아하는 이유다.


나는 금새 싫증을 내는 성격이지만 오래된 것들을 좋아한다. 오래된 집을 개조한 까페, 오랜 시간 발효한 차(tea), 오래된 나무. 물건도 그렇다.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오랜 시간에 걸쳐 찾아낸다. 그리고 그 물건이 자신의 기능을 다 할 때까지 사용한다.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면 조용히 혼자 작별 인사를 하고 보내준다.


오늘은 오래된 요가 바지를 떠내보냈다. 나의 첫 요가바지였다. 7년 전, 돈을 벌기 시작하고 제대로 운동을 시작하면서 장만한 바지다.  그 바지를 입고 발레도 배우고, 요가도 배우고, 필라테스도 배웠다. 날이 좋은 날에는 그 바지 위에 큰 티셔츠를 입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그 바지를 입고서는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까 그 바지를 입었을 때의 나는 늘 마음도 몸도 산뜻했다.


작년즈음부터 흐물흐물해지더니 올해는 안쪽 바느질선이 1cm정도 터졌다. 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도 벌면서 무슨 궁상이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바로 버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 바지를 입고 우울한 적도 많았다. 회사에서 별 소리를 다 듣고 요가원에 온 날들이 있었다. 요가매트 위에 누워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데 무슨 동작을 하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마음이 답답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바지를 입고 애써 털어내보려 했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잊어보려 했었다. 그리고 요가원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아- 그래도 이렇게 하루가 또 갔구나. 이렇게 한참을 추억하고 나서 쓰레기봉투에 바지를 넣었다.


완두콩 버무리
재료: 완두콩 100g, 기장가루 15g, 찹쌀가루 15g, 설탕 10g, 소금 한 꼬집, 물 10g, 콩가루 장식용 약간

봄에 떡집에 가면 '쑥버무리'를 자주 볼 수 있다. 엉성하게 쪄낸 떡 사이사이에 쑥이 엉키어 있다. 밀도 높은 떡은 배가 너무 불러서 많이 못 먹는데, 이 버무리를 쌀가루 반, 부재료 반이 한데 엉성하게 섞여 있어서 꿀떡꿀떡 잘 넘어간다.


집에있는 기장가루, 찹쌀가루를 넣고 완두콩 버무리를 만들었다. 원래는 습식 쌀가루와 찹쌀가루를 넣고 만들어야 하지만, 습식 쌀가루를 동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가 없어서 건식 쌀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는 편이다. 건식 쌀가루로 모든 종류의 떡을 만들 수는 없지만 떡 비슷하게는 만들어 볼 수 있어서 종종 해본다.


버무리 만드는 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 기장가루, 찹쌀가루, 설탕, 소금, 물을 모두 볼에 넣은 후에 작은 거품기로 휘리휘리 저어준다. 반죽이 곱게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거품기로 섞어주는 것이다. 버무리는 깔끔한 떡반죽이 아니라 크럼블처럼 크고 작은 반죽 덩어리들이 엉기성이 모여있어야 제맛이다. 어느정도 가루와 물이 섞여들면 완두콩을 넣는다. 완두콩이 균일하게 퍼지도록만 섞으면 끝! 그릇에 담고 찜기에 15분 정도 쪄준다. 좀더 고소하게 먹으려고 콩가루를 조금 뿌려주었다.


완두콩의 철에는 신이 난다.

완두콩으로 밥도 해 먹고, 수프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완두콩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단맛과 고소함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서나 주인공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완두콩 같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쓰일 수 있고 어디에서나 자기 색깔을 당당하게 유지한다. 모습이던, 맛이던, 식감이던, 성격이던 나는 지나치게 좋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할 몫을 다하면 된다. 한참 잊고 있다가 다시 찾았을 때 여전히 변치 않는 그만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가 '왔니? 나 잘 있었어. 우리 또 잘 해보자' 말을 건네는 것 같아서 좋다.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렇다. 오래된 물건과 함께하면 마음이 편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의 오래된 물건들,

나의 오랜 친구들,

오래 간직한 나의 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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