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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Apr 10. 2021

나 홀로 밤에 끓이는 채소 수프

<매일매일 채소롭게> 토마토

혼자인 밤은 기어이 익숙해진다. 외로운 것도 무서운 것 도 심심한 것도 째깍거리며 가는 시간처럼 흘러간다. 익숙한 혼자의 밤마다 토마토 수프를 한 솥 가득 끓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토마토를 숭덩숭덩 썰어서 법랑 바트에 가지런히 올려 둔다. 그러고는 냉장고를 뒤적거리다가 당근이든 버섯이든 양파든 가지든 애호박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꺼내 씻는다. 흐르는 물에 슬렁슬렁 씻은 채소들을 또 숭덩숭덩 썰어서 법랑 바트를 하나 더 꺼내 가지런히 올려 둔다. 가장 좋아하는 냄비에 물을 두 컵 붓는다. 토마토, 당근, 버섯, 양파, 가지, 호박을 차례로 넣는다.



채소 수프의 기운이 온 집 안을 휘감는다. 그저 채수 냄새라고 하기에는 깊고 진하고 풍부하다. 집 안 가득 토마토 베이스의 각종 야채들 향을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 홀로 있는 이 공간을 무언가로 채웠다는 안도감 같기도 하다. 이렇게 끓여 두면 며칠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든든함이기도 하다. 차게 먹어도 데워 먹어도 몇 번을 반복해서 데워도 한결같이 맛있는 이 무적의 수프를 충전했다는 뿌듯함일 수도 있다.

혼자인 날들이 하루하루 쌓여 가고, 나는 조금씩 천천히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 해 보지 않았던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고, 이 많은 일을 혼자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이제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가끔 어떤 날들은 버겁기도 했는데, 그런 날에는 집에 돌아와 냄비 가득 수프를 끓였다. 수프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수프를 바라볼 때가 있다. 수프는 공기 방울을 보글보글 뿜어내며 끓고 있고, 나는 이 수프를 바라보고 있고, 지금 이 수프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이 평화를 즐긴다. 어쩌면 이런 것도 명상의 일종일지 모르겠다.

눈으로는 채소 수프를 보고 있지만 실은 내 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가만히 돌아보며 괜찮아 별일 아니야, 지나 보면 기억도 희미해질걸,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 둬서 뭐해, 그 정도면 잘했어, 그래도 오늘 실망했겠다, 서운했구나, 민망했을 수 있겠다, 스스로에게 얘기해 본다. 채소를 빌려 나를 위로한다. 또 다음 날 하루만큼은 버틸 힘이 생긴다.




** 4월 5일 식목일에 출간된 저의 첫 책, 채소 에세이 <매일매일 채소롭게>의 일부입니다.

책의 내용 중 10개 꼭지를 골라 조금씩 소개하려 합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9028342?OzSran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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