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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Apr 15. 2021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매일매일 채소롭게> 당근

당근의 주황색이 좋다. 채소라고 하면 떠오르는 초록빛이 아니어서 그 전형적이지 않음이 좋다. 비트의 붉은색처럼 강렬하지 않아서 그 부담스럽지 않음이 좋다. 주황은 적당하다. 당근은 적당하다. 적당히 달아서 주스로도 먹고, 적당히 단단해서 아삭아삭 베어 먹기도 한다. 과일과도 어울리고, 밥에 넣어도 어울리고, 베이킹 재료로도 어울린다. 적당해서 무엇과도 어우러지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요리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만큼 칼질이 서툰 편이라 당근 두세 개를 손질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린다. 그래도 아주 천천히 늘고 있고, 또 하다 보니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칼질할 때는 위에서 아래로 툭 내리듯이 써는 것보다 지나가면서 힘을 주어야 쉽다는 것.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어 한 번에 힘을 쓰면 힘들고 속도도 나지 않는다는 것.  멈추어 힘주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면서 리듬을 타듯이 썰다 보면 어설프고 느린 손놀림으로도 얼추 손질을 끝낼 수 있다.

시작을 고민하는 시기.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뜨거울 때일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내가 꿈꾸는 가게나 공방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당근을 썰듯이, 멈추어 힘주는 것보다 지나가며 힘주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지 않을까. 며칠 생각을 정리하고 모임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차의 아름다운 향에 집중해 보는 시음 워크숍이다. 차의 향기는 그즈음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주제였고, 차에 빠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홍보문을 쓰고 인스타그램으로 인원을 모집했다.

무언가에 시간과 돈을 지불한다는 것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적게 모이고 어렵게 모일지라도 아직까지는 취소 없이 워크숍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 경험이 늘어날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생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지속해 나갈 힘이 있구나. 어쩌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는 없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 4월 5일 식목일에 출간된 저의 첫 책, 채소 에세이 <매일매일 채소롭게>의 일부입니다.

책의 내용 중 10개 꼭지를 골라 조금씩 소개하려 합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9028342?OzSran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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