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yRound 기고 채소 에세이 [타이바질]
후둑. 후둑. 후두둑.
숨가쁜 퇴근을 하고 요가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예고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요즘은 내가 사는 곳이 한국인지 동남아인지 알 수가 없다. 변해버린 여름 날씨에 적응을 못한 사람이 나 말고도 더 있나보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머리를 두 손으로 가리고 뛰기 시작했다.
일찍 서둘러 회사를 나왔는데도 지각이다. 이미 요가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빈 자리를 찾아 매트를 깔고 옆 사람을 따라 자세를 취한다. “바로 서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가 몸을 반으로 접고 플랭크, 업독, 다운독, 3세트 반복! 다시 한번 더! 백밴딩, 고개 숙였다가 플랭크, 업독, 다운독, 백밴딩, 고개 숙이고…” 윽! 정신 없이 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고 나와보니 다행히 비가 그쳐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찔끔찔끔 비가 오는 요즘 날씨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저녁 8시 반. 운동을 할 때는 힘들어서 배고픈 줄도 몰랐는데, 집에 돌아오니 참았던 허기가 온몸으로 몰려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허겁지겁 빵이나 냉동 만두를 많이 먹었다. 맛을 느끼며 먹는다기보다는 지친 몸에 연료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먹었다. 그렇게 후다닥 식사를 마치고 나면 소화가 안 돼서 늦은 시간까지 뒤척이다가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툭 튀어나온 아랫배를 보며 '왜 그랬을까...' 후회했지만 운동을 다녀오면 또 늦은 밤 급하게 속을 채웠다.
도시락 싸기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유지해왔던 ‘허겁지겁 저녁 식사 습관’을 끊었다. 건강해지려고 애써 운동까지 다녀와서 아무거나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냉장고 안에는 주말에 넉넉하게 만들어둔 타이 바질 페스토가 있다.
요즘은 매일 밤 내일 저녁을 위한 페스토 도시락을 준비한다. 페스토는 활용이 무궁무진한 고마운 식재료다. 파스타, 감자, 두부면, 밥, 곡물빵 그 어떤 베이스와도 잘 어울리는 데다가 만들기도 쉽고 보관도 편하다.
여름에는 바질 페스토를 즐겨 만든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바질은 ‘스위트 바질’이다. 스위트 바질도 맛있지만 이번 여름은 ‘타이 바질’에 푹 빠져있다. 요즘은 동네 마트만 가도 바질, 민트, 고수 등 다양한 허브를 볼 수 있는데 타이바질은 대형 마트나 프리미엄 푸드마켓에서 보지 못했던 독특한 채소다. 타이 바질의 존재는 작은빛농원 블로그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채소 에세이를 쓰면서 건강하게 기른 채소를 판매하는 작은 농원들을 알게 되었다. 작은빛농원도 그중 하나였다. 입맛 까다로운 농부님의 엄격한 기준으로 선택된 채소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일 년 넘게 거래하고 있다.
작은빛농원은 보기에 맛있어 보이는 채소가 아니라 먹었을 때 맛있는 채소를 판매한다. 그 맛을 한번 본 이후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농원 블로그에 들어가서 새로 판매하는 계절 채소들을 구경한다. 얼마 전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타이 바질 판매 공지를 보게 되었다.
잎이 넓적한 스위트 바질과는 달리 타이 바질은 날렵하고 얇은 잎을 가지고 있다. 줄기 끝에는 라벤더처럼 생긴 꽃도 달려 있다. 페스토를 만들어 먹어도 되고, 샐러드나 볶음 요리에 두루두루 활용하면 풍미가 업그레이드된다는 설명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며칠 뒤 도착한 타이 바질 박스를 반가운 마음으로 열었다. 열자마자 독특한 향이 주방 가득 퍼졌다. 허브가 풍부하게 블렌딩된 차(tea) 상자를 연 것만 같았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바질 고유의 향 위로 통통 튀어 오르는 향이 민트 같기도 하고 고수 같기도 했다.
개성이 강한 타이바질은 묵직하게 맛의 중심을 잡아주는 통밀 파스타나 통밀 식빵과 잘 어울린다. 통밀 파스타를 만들 때 페스토와 함께 타이 바질 생 잎을 한 줌 넣어 볶아 먹으면 더 맛있다.
가끔 회사 점심으로 페스토 요리 도시락을 싸가기도 한다. 내 도시락을 본 팀원들은 매번 놀란다. “어쩜 이렇게 부지런해요? 저는 힘들어서 도시락은 생각도 못 해요.” 그때마다 “별로 안 힘들어요. 금방 준비해요.”라고 말하지만 다들 믿지 않는 표정이다.
페스토 요리는 만드는 데 정말로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요리’보다 ‘조립’에 가까운데 그 조합이 무궁무진하다는 게 페스토 도시락의 매력이다. 설거지 거리도 얼마 안 나오고 며칠 냉장 보관해도 끄떡없다. 냉동하면 한 달 넘게 먹을 수도 있다.
그럼 이제 오늘의 저녁 식사를 시작해볼까. 냉장고에서 타이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1분 데운다. 도시락을 먹을 때는 텔레비전도 유튜브도 없이 오로지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 나를 위해 요리한 음식의 맛을 천천히 느끼며 꼭꼭 씹어 먹는다. 재료가 가진 매력을 놓치지 않고 알아봐 주는 마음으로.
공들여 요리하지 않아도 충분히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힘들이지 않고도 건강하게 나를 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밤마다 나는 채소 도시락 한 그릇 만큼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