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단 Jun 06. 2021

사회의 기준을 잘 따를수록 무기력해지는 이유

지금 우리가 해방을 말하는 이유


마음속 반항아 기질을 숨기고 모범생으로 살아가면서 주변에 많은 모범인들을 두게 되었다. 이들은 사회가 정한 규칙과 문화적 관습을  따르고 자신의 욕구 또한 사회적 욕구와 일치시키는  높은 수준의 사회 역량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분명 사회에서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일상에 대한 높은 만족감을 갖고, 사회적으로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회에 자신의 기준을 맞춘 것일 테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그들은 여전히 힘들고 불안해 보였다. 이미 충분할 만큼 성실하게 규칙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점점  많은 규칙들을 자신의 삶에 부여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게임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사회가 만든 규칙이라는 것은 언제나 모순과 실패가 뒤따른다. 다수의 개인이 '완벽하게 만족하는 합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법리적인 논의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사회 통념에서 일부가 다수를 배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수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다수가 소수를 배제'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수가 다수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고, 다수는 소수가 내세우는 강자의 논리에 무기력하게 따를 뿐이다. 소수에게 속은 다수는 소수가 만든 강자의 규칙에 무기력하게 참여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한 표를 행사함으로써 그들의 논리를 굳건하게 지켜낸다. 저소득 노인 계층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사회 통념 생산자에서 밀린 '다수의 약자'인 것을 자꾸만 잊는다. 이것이 우리가 힘을 모아 함께 맞서야 하는 이유이다.

** 통념: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는 개념 (일반적이다, 널리 통한다 라는 말도 의심할 여지가 있다)


소수가 만든 '다수를 위한다는 거짓 논리'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위압적이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들어도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쉽게 사회적 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수의 힘은 굳건하고 거대해서 잘못되었다는 외침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무기력해진다. 저들에게 맞서 '이것은 잘못되었다. 바꿔야 한다.'라고 외치는 것보다 차라리 그들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드는 것이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수 중에서 강한 소수가 되는 것이 저들에게 맞서는 것보다 쉬운 길이기 때문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기를 택한다.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보자.


이제는 다수가 '잘못되었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낡은 통념으로 생각해보겠다.


통념: 좋은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직하는 삶이 그렇지 못한 삶보다 가치 있다.

이 논리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A그룹] 통념을 믿고 따르며 좋은 대학과 대기업이라는 기준을 충족했으며, 스스로를 그렇지 못한 타인보다 가치 있다고 여긴다.

[B그룹] 통념을 믿고 따랐으나 좋은 대학과 대기업이라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으며, 스스로를 그렇지 못한 타인보다 가치 없다고 여긴다.


A와 B그룹의 믿음에 의하면 A그룹은 자신의 삶을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A그룹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유롭게 의사 결정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의사결정을 따른 것이다. 그들은 세상은 개인이 바꿀 수 없는 것이라 믿는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주어진 규칙을 '잘 따르는 것'이며, 그 규칙이 다수에게 맞든 맞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칙에 맞지 않는 다수는 자신보다 아래 계급에 위치하며 자신은 하위 계급과 다른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욕구와 이해관계를 달리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우월감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다. A그룹은 자신이 이 사회의 논리를 만든 소수와 다른 계급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언제고 소수가 법을 바꾸고 통념을 바꿔버리면 상실할 신분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우월감은 무기력하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순간 안에서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A그룹은 소수가 만든 사회 규칙은 사소한 문제가 있을지라도 바꿀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불안해진다. 이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우월감'을 언제 상실하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상실 시점을 유예하기 위해 삶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부동산 투자와 자녀 교육은 '우월감 상실 시점'을 최대한 뒤로 늦추기 위한 노력이다.


이제 이 흐름을 끊어낼 때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는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사회는 개인이 힘을 모아 바꿀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사회는 바뀐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렇게 바꿔왔다. 광주에서, 광화문에서, 제주에서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 모든 지역에서 우리는 힘을 모아 '바꿀 수 있으며, 바꾸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해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개인은 무기력할 수 없다. 함께 사는 공간을 함께 더 잘 살기 위해 만들어나가는 '사회의 성원'이 어떻게 무기력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방을 공부하는 이유이고,

새로운 <해방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이유이고,

함께하자는 초대에 응답한 이유이다.




<함께하는 독학클럽>에서는 격주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눕니다. 앞으로 우리가 나눈 생각들을 성실하게 기록할 예정입니다. 기록하는 자는 지지 않는다고 믿으며,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목소리에 마이크를 가져오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하는 독학클럽, 시작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