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독학클럽>오리엔테이션
함께하는 독학클럽 첫 시즌의 주제를 <어른의 조건>으로 정하며 '특정 나이대의 멤버들이 모이겠다.'는 짐작을 했다. 역시 호스트인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사회생활 3~9년 차 사이의 생활인들이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를 하던 시기를 지나면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 질문은 끝이 없고 답도 없다.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 질문을 이어나가기가 어려워져서 한동안 잊게 되고, 결혼이나 아이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답을 찾아 헤맨다. 우리 6명은 아마도 계속해서 답을 위한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스스로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 없는 사람도 있냐고 되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다.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지, 어떤 일을 할 때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어떤 일을 할 때는 감정적으로 소진되는지 모른 채로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으로 자신을 경험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어쩌면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도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속한 이 곳이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내가 속한 시대와 공간, 상황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사회/조직/시대와 나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나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 내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외부와의 관계로부터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존재이지만,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이며, 사회과 타인을 제외하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현주 작가의 <일하는 마음>을 읽으며 사회와 시대의 맥락을 초월한 '진정한 나'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 <일하는 마음> 제현주
책의 일부 내용을 편집해서 올렸습니다. 원문이 지나치게 많이 인용되어 문제가 된다면 말씀부탁드려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인투 더 와일드>에서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명문대를 졸업한 직후 '진정한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전 재산을 빈민구호단체에 기부하고, 가족에게 아무런 소식도 남기지 않고, 이름도'알렉산더 슈퍼트램프'로 바꾼다. 야생에 당도한 크리스토퍼는 진짜 자기 자신과 만났을까? 야생의 공간에서 홀로 겨울을 맞은 크리스포터는 결국 그곳에서 굶어 죽고 만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쓰게 되는 가면과 그 뒤에 숨은 진짜 내 얼굴이 따로 있다는 식의 서사와 종종 마주한다.
어빙 고프먼이 쓴 [상호작용 의례]에 따르면, 가면 뒤에 숨은 실체가 진정한 나라는 믿음은 착각이다. 고프먼은 일상 속 상호작용을 일종의 공연으로 인식하여 "자아를 이중의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공연된 "이미지로서의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공연을 수행하고 평가하는 "의례 게임의 선수와도 같은 자아"다. 공연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와 공연된 결과로써의 자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둘이 한 세트로 '나'를 이룬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공연은 언제나 무대를 전제로 하므로 자아를 무대와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무대는 공연된 자아에 영향을 미치며, 다시 공연된 자아는 공연자로서의 자아를 변형시킨다. 따라서 무대로부터 아무리 멀어져도, 그리하여 공연자로서의 자아만이 남는 장소에 이른다 해도, 그 자아에는 공연이 일으킨 변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니 크리스토퍼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정한 나는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수행할 어떤 공연도, 의식해야 할 어떤 관객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크리스토퍼가 마주한 것이 진정한 나였을까.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 쓰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죽음을 예감하며 남긴 마지막 메모에 스스로 부여한 이름 '알렉산더'가 아니라 '크리스포터'라는 이름을 남긴다. 그는 다시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자리로, 바로 그 이름으로 돌아간 채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표의 '점'이 아니라 '그리드'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드 안에 있는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나도 잘 모르는 나를 알기 위해, 일단 우리를 둘러싼 '지금, 여기'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뤄볼 것이다.
첫 책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바로 그 문제의식으로 선정했다. 독학클럽에 모인 우리들은 어른 공부를 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시간을 내서 개인 노트북으로 zoom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체의 장애가 없으며, 당장 먹고살 만큼의 돈이 있고, 나를 찾는 여정에 투자할 시간이 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갖춰진 사회' 속에 속해 있다. 그리고 아마도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 '배타적으로 갖춰진 사회'에서 배제된 경험은 없을 것이다.
그런 우리가 '다른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손으로 옹알이를 했다. 농인 부모로부터 수화언어를 배웠고 세상으로부터 음성언어를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바라본다. 그렇게 세상을 마주할 것을 가르쳤던,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질문하기를 가르쳤던 부모가 있었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사람이 되었다.
- 당신을 이어 말한다, 이길보라
우리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 자본 중심 사회, 능력과 성과 중심 사회, 표면적 공정 중심 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이 중심을 무겁게 지탱하고 있는 무게 추를 살짝- 손으로 퉁겨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볼 것이다.
그 흔들림 속에서 휘청이며 질문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우리 각자를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이곳은 누구에 의해 디자인되고 유지되고 있는지, 그 중심 추를 어떻게 어느 방향을 향해 옮겨둘 것인지.
<함께하는 독학클럽>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앞으로의 거창한 계획보다는 각자가 가진 스스로에 대한 '따뜻한 에너지'를 느끼는 시간이기를 바랐다. 진중한 결심들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천천히 풀어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각자의 독서습관과 요즘 읽는 책, 이번 시즌 주제 <어른의 조건>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개인적으로 모집한 독서모임이라 그런지 매번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다. 책을 좋아하고,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하고, 일과 일상에 대한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서모임에 찾아온다.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깜짝 놀라는 순간들이 많다.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도 이렇게 생각이 다양하구나.' 하고 말이다. 그 다름이 모두 틀리지 않음에 다시 한번 놀란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맥락 속에서 나온 생각들이 경쾌하게 부딪히는 것이 즐겁다.
앞으로 4번의 시간이 분명 짧고 아쉬울 것이다. 그러나 함께하는 독학은 계속될 것이고, 우리는 이 모임이 끝나도 계속해서 함께 나아갈 것임을 알고 있기에 앞으로의 대화들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