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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l 13. 2021

<불안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 - 2부

<함께하는 독학클럽> 여름시즌 두 번째 책

** <함께하는 독학클럽> 호스트 단단입니다. 이번 시즌에는 <정원, 효연, 혜수, 혜진, 지혜> 다섯 분과 함께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다섯 명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더 넓고 깊게 확장되어 더 많은 분들과  연결되고 힘을 모으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나눴던 이야기와 생각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록은 호스트 단단의 관점에서 정리된 독서모임 이야기입니다.



불안한 어른 & 급진적 자기돌봄


** 텍스트 소개: 다음 두 개의 텍스트를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1) <불안한 어른, 지금 한국의 서른을 말하다> 이민경, 북저널리즘, 2) 칼럼 <2021년은 급진적 자기돌봄의 해>, 김정희원

** 아래 내용은 대화 녹취록이 아닙니다. 모임에서 나눴던 이야기와 독서노트에 작성된 내용을 기반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 <불안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 - 1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Q. 여러분에게 서른이란 상징적인 의미인가요?


단단 |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가 정해져 있을까요? 이민경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나이란 흘러가는 자연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눈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한 나이에 대한 나름의 기대가 있다. 나이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악랄한 이데올로기’인 생애 주기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삶의 모습을 요구하기도 한다.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있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모두 나와 타인의 나이를 의식하고 살아간다. (1화. 서른 바로 읽기)


저는 몇년 전부터 '나이'를 인식하지 않게 되었어요.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동질감보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동질성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나 아예 '나이'에 대해 상징성을 부여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요즘은 '마흔'쯤 되면 원하는 일을 하고 살고 있겠지? 하는 식으로 예전에 '서른'을 기대했더 것처럼 '마흔'을 기대하거든요. 열살보다 스무살이라는 나이에 더 큰 상징성을 부여하듯이 서른보다는 마흔에 더 의미를 부여해요. 그만큼 요즘 시대에 서른은 '어른'이라고 불리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서른은 아직 자립하기 힘든 시기인 것 같아요. 굳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열살, 스무살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고민을 하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정원 | 십대 때는 25살만 해도 먼 미래로 느껴졌어요. 서른쯤 되면 뭔가가 끝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서른에 가까워지니 전혀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삼십대가 되면 지금보다 좋아질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어요.


지혜 | 우리 중 서른을 지나온 멤버들에게 묻고 싶어요. 서른 이후의 삶은 어떤가요?


단단 | 저는 결혼을 27살에 일찍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서른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진 않았어요.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자인 김하나 작가가 종종 방송에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20대보다 30대가 좋고, 30대보다 40대가 훠어어어얼씬 더 좋다고요. (웃음) 20대 때에는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고, 30대는 내밀한 진짜 자아를 찾아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각이 안정감을 주는 것 같고요. 사십대는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상을 향해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시기일 것 같아요. 아직 삼십대 초반이지만 저는 벌써 사십대가 기대되요.


혜수 | 이십대 때는 서른이 넘으면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악랄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이죠. 대학생때 꿈은 PD였어요. 돌아보면 스스로를 제대로 탐구하면서 발견한 꿈은 아니었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준비하진 않았어요. 정신없이 바쁘게 취업을 하고보니 저는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요. 오랜 고민 끝에 서른을 넘긴 후 방송국으로 이직을 했어요. PD는 아니었지만 절충안이었던 셈이죠. 서른, 서른한살 때는 일부러 더 자유롭고 다양하게 지내려고 했어요. 여행도 많이 다니고, 매일 놀고요. 방황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다 서른 둘이 되면서 다시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어요. 조금씩 안정감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돌아보면 삼십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압박을 받는 것 같아요. 서른 이전에는 서른에 뭔가를 이뤄야 할 것 같고, 서른 이후에는 여전히 자유롭고 재미있고 가벼워야 할 것 같고요. 그런 강박들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의외로 '체력'이었어요. 제가 체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서른두살 즈음을 계기로 피곤함, 졸음, 체력적 힘듬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체력이 중요하더라고요.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도 유연하고 자유롭게 쓸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는 대신에 체력을 탄탄하게 쌓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래를 꿈꾸며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나이든 상관 없겠더라고요. 이 때는 뭘 해야 하고, 이래야 하고, 이런 압박을 갖지 말고 순간순간 충실하게 살자는 생각을 요즘은 하고 있어요.


효연 | 저도요. 어떤 삼십 대를 보내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건강하고 싶다'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일을 시작하고 4~5년 동안은 무리해서 새벽까지 일을 했어요. 제가 체력이 약한 편인데 그때는 정신력으로 버텼어요. 그 이후에 독립해서 제 사무실을 차리고 난 후 그만큼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학생들을 동기부여하는 일을 하다보니 에너지를 정말 많이 써야하거든요. 일 외에도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 때도 있는데, 그러려면 또 체력이 필요한 거에요. 앞으로는 정말 하고싶은 것들 하고 살려면 체력이 중요하겠구나 싶어요.


혜진 | 꼭 삼십대를 앞두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십대 초반부터 목표로 삼았던 것이 '조금 더 안정적인 사람, 지혜로운 사람, 현명한 사람, 연륜있는 사람' 이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힘들고 슬픈 경험들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스스로가 단단해졌다는 감각이 들어요. 눈 깜짝하는 사이에 벌써 서른을 앞두게 되었고, 더욱더 삼십대에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 싶어요.


지혜 | 성격상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는 편이 아니었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무엇을 하면 기분이 좋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점점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이리도 끌려가고 저리도 끌려갔던 경험 덕분에 오히려 더 스스로에 대해 잘 알 수 있게된 것 같아요. 맞다고 생각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목소리를 내면서 사는 게 스스로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그래야 스스로에게 더 떳떳하고 마음도 풍요로울 것 같아요. 지금 저는 여러 갈래의 길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최근에 서른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비건 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가고 있는 중인데요, 운동하고 바디프로필을 준비하면서 식단에서 충돌이 있었어요. 바디프로필을 찍고 나면 더 공부해보고 싶어요.


혜수 | 몇년 전에 단단님이 공유했던 책 내용이 생각나네요. 인간이 '자유 의지'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게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정말 최근의 일이라고요. 자유가 생겼다는 건 참 좋은 세상인 건데, 그 자유가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말했잖아요. 그 말이 간간이 생각나더라고요.


단단 | 그때 제가 굉장히 화나 있었죠.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사실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말이죠. 혜수님께 그 내용을 공유했던 기억은 없는데 신기하게도 다른 친구들에게 그 이후로 몇번 똑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Q. 우리는 어떤 공정함을 말해야 할까요?


정원 |  <보통>과 <공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다들 이 두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정>에 대해 모두가 한 번은 봤을, 가장 유명한 그림을 가져와봤어요.



단단 | 요즘 공정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죠. 저는 문재인 정부가 '공정'이라는 단어를 흥행시켰다고 생각해요. 공정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진 기대감이 실망으로 변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정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해요. 누군가는 공정이라는 단어를 왜곡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공정을 공평과 같은 의미로 쓰는 것 같기도 하고요.


효연 | 사회적인 문제, 개념을 제 삶에 접목하려고 하는데, 저 스스로도 게속 헷갈리더라고요. 남녀 문제를 접할 때도 제 기준이 흔들린다고 느꼈고, 다른 문제들에서도요. 그래서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여러 상황 속에서 공정에 대해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정원 | <보통>과 <공정>에 대해서 계속 생각이 바뀌는데요. 보통이라는 단어가 폭력적이라는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표준, 평균, 보통이라는 게 사실은 현실에는 없잖아요. 이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하자면, 세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무엇인 공정인지 생각하잖아요.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야구장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제외하고 있는 거에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거죠. 공평과 공정이라는 개념도 결국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말 아닐까요? 코로나 발생 이후 20대 여성 자살율이 늘었다고 하는데, 저는 주위에서 본 적이 없거든요. 스스로 세상을 좁게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제 시야에도 한계가 있는 거에요. 우리가 공정과 공평을 이야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어졌어요.


단단 | 작년 여름 즈음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 직원의 정규진 전환 이슈가 뜨거웠잖아요. 저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하게 대립한 의견들을 보면서, 공정이라는 개념이 결국 '내가 가진 것을 얼마큼 내어 놓을 수 있는가?'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힘들게 고생해서 번 돈, 몇년 간 인내하며 공부한 시간과 노력, 이것들은 단순하게 '그럴 기회를 가졌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경기장 안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하면 내키지 않거든요. 스스로에게도 물어봐요. 공정한 사회를 위해 나는 내가 가진 것 중 무엇을 얼마큼 양보할 수 있는지요. 공정이란 무엇일까요? 라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공정함을 위해 어디까지 양보하실 수 있나요?


효연 | 구체적인 상황을 정하면 좋을 것 같아요.


혜수 | 제가 한참 신혼집을 구하러 다녔던 시점이 코로나 이후 집값이 폭등했던 때였는데요. 신혼부부 지원 사업을 알아봤더니 소득기준이 있더라고요. 저와 남자친구는 각자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그 사업에 신청할 수 있는 소득 기준과 너무 차이가 나는 거에요. 저희에게는 당장 2억도 어마어마하게 큰 돈인데 말이에요. 그런데 소득은 없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산이 있는 사람들은 신청할 수 있더라고요. 지원이 필요한 대상을 100% 정확하게 선별해서 지원하는 정책이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정부 정책에 화가 나더라고요. 그때 화를 내는 저를 보면서 놀라기도 했어요. 이런 예시는 어떨까요? 즉,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는 상황이요.


단단 | 음... 저도 제 삶에 비추어 상황을 생각해보자면 일하는 부모에 대한 지원 정책이요. 저는 무자녀 부부인데,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생각하면 비슷한 감정이 들어요.


효연 | 소상공인에 대한 재난지원 정책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영업정지 대상 업체들이 지원금을 받는 걸 보면서 '나도 힘든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도 세금은 계속 내는 상황에서 매출이 줄었거든요. 지원 대상에 대한 기준 자체가 애매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원 |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익명게시판에 정부의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해서 원망스럽다는 감정을 토로한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받은 혜택, 특히 회사로부터 받은 혜택이 분명히 있거든요. 우선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지 말자고요. 일상이 가능한 수준의 삶이라면 나머지는 좀 양보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무상급식 문제도 비슷해요. 사람들이 왜 부자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무상으로 급식을 지원해야 하냐고 하지만, 저는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더 걷으면 되죠. 누구는 받을만 하고 아니고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전세자금 지원 정책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자신의 소득을 증명하고 힘들게 요구할 필요 없이 넓은 범위로 지원해주는 게 맞다고 봐요. 세금에 대한 관점도 전환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 남을 위해 내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사용한 인프라에 대한 비용을 지불한다고 볼 수도 있는 거죠.


단단 | 아마도...? 제 생각에는 정원님이 처음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셨을 때, <공정>이라는 단어보다 먼저 <보통>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누구나 다른 상황에서 태어나죠. 뭔가 가지고 시작하기도 하고, 부족하게 시작하기도 하고요. 그것이 우리 각자의 다양성을 만들어주는 동시에, 그것을 '손에 쥐고' 인생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재된 채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의 출발선이 어디였는지 잊는 거죠. 그런데 이 <보통>이라는 개념은요,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을 포함해서 사람들을 분류해요. 그러니까 사실은 사람들을 어떤 기준으로 나눠서 혜택을 준다는 개념이 안 맞는 거죠. 자연스럽게 기본소득으로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사회적으로 나눠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누구나 받을 것을 받는다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싶긴 한데 어렵네요. (웃음)


혜수 | 누군가 사회적 분배의 과정에서 발끈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나보다 상황이 안 좋은 사람이 나보다 많이 지원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는 건 아닐 거에요. 분명 나보다 나은 상황인 것 같은데 나보다 많이 배분된다고 느낄 때 화가 나는 것 같아요. 비교하게 되는 거죠. 결국 공정함이 어려운 이유는, 공정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재난지원금을 예로 들면, 지원금 액수는 정해져 있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배분해야 하는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 다른 거에요. 완벽한 기준이란 불가능하고요. 사람들이 공정함을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고요. 이 그림을 보면 <공평>은 훨씬 쉽잖아요. 동일한 크기의 상자를 만들면 되는데, <공정>을 위해서는 높이값을 상황에 맞게 조정해야 하죠. 이 그림은 단순화한 모델이지만 현실에서는 정말 쉽지 않죠.


단단 | 그래서 더더욱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공정할 수 없다면요.


혜수 | 그 주장에는 아마 아무도 이견이 없을 거에요. 그러나 현실화하기 어려운 데에는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는데는 세금이 필요하고 그 세금이 어떻게 걷히고 어떻게 쓰이냐에 대한 불신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몫을 나누는게 정말 아까워서라기보다는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렇게 집값이 폭등하고, 내가 살 곳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몫을 나눈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정원 | 결국 시스템이 문제인데, 시스템 안에 있는, 시스템 아래에 있는 사람들끼리 다툰다는 생각이 들어요. 환경 문제도 그렇잖아요. 소비자 개개인도 경각심을 가져야겠지만 기업부터 규제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개인에게 그 책임을 돌리죠?


효연 | 제 수강생이 최근에 수업을 중단했어요.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가 코로나로 상황이 어려워져서요. 그런데 부모님이 가게를 운영하려고 가지고 있는 트럭이 한대 있었대요. 그 트럭 때문에 소유한 자동차가 2대로 인정되어서 지원금을 하나도 못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공부도 중단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는데도 말이에요.


정원 |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이에요. 처음부터 기준을 넉넉하게 설정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줄 수 있는데,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제도를 보완하려다가 그렇게 된 거죠.


단단 | 사실 선의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 그것을 보완하려는 시스템의 한계, 그 과정에서 쌓이는 불신으로 인해 사회 기능의 오작동하는 거죠. 제가 최근에 정치 기사에 달린 댓글을 봤는데요. 이준석 당대표가 대변인단을 꾸리면서 '토론 배틀'을 제안했어요. 보통은 당에서 오래 활동한 경험있는 사람, 또는 말을 잘한다고 인정 받는 사람, 당대표 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변인단이 되는데 이준석 대표는 '공정하게 대결하자'라고 하는 거죠. 그게 이준석식 공정함이라고 이해했는데요, 거기에 달린 댓글이었어요. 댓글 작성자는 회사도 똑같이 매년 시험을 봐야 한다고 주장해요. 변호사나 의사도 그렇고요. 한 번의 절차와 노력으로 특정 집단 안에서 계속 지위를 유지하는 게 부당하다는 거죠. 사실은 아주 과격한 글이었는데요. 마지막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당신도 내가 사는 지옥으로 내려와." 그 말은 댓글을 쓴 사람이 지옥에 살고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의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혜수 | 댓글을 보다보면 점점 더 감정 배출의 장이 되어 간다고 느껴져요. 무서운 건 정원님 표현처럼 정말 비난해야 할, 위에 있는 누군가는 따로 있는데, 그 아래에서 우리끼리 서로를 향해 '내가 더 지옥이야'라고 싸우는 거잖아요. 너무나도 다루기 쉬운 상황인거죠. 그러나, 내 삶이 지옥이라는 이유로 나보다 타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정말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신도 내가 사는 지옥으로 오라."는 댓글은 굉장히 폭력적이에요. 내가 힘들다고 남도 힘들어야 되는 것도, 남에게 폭력적인 말을 해도 되는 것도 아니죠. 결국에는 개인이 서로를 향해 화살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 문제임을 직시하고 연대해야 해요. 함께 읽은 급진적 자기돌봄 칼럼에서 <돌봄 네트워크> 개념이 나오잖아요. 독서 노트에도 어떤 돌봄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은지 질문이 있었는데요, 저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독서모임도 돌봄 네트워크라고 생각해요. 개인이 각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모여서 깊게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첫 모임 때 너무너무 설레기도 했어요.


혜진 |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요. 지금까지 저의 노력과 상관없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제가 가진 것을 뺏으려고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한다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어요. 생각보다 저에게 이기적인 면이 있을 수 있겠더라고요. 평소에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동안 저는  '할 수 있는 선까지'만 관심을 가졌던 거더라고요. 이 문제에 대해서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단단 |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누는 게 맞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때부터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게 되니까요.


지혜 | 요즘 세대들이 하는 이야기들, '노력해도 안 된다', '출발선이 다르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었는데요.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그것 조차도 달라질 수 있겠더라고요. 정원님 말씀처럼 그림에 있는 경기장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이 문제는 정말 넓고 복잡한 사안이구나 싶더라고요.


단단 | 꾸준히 관심갖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만큼이요. 스스로 내켜서 할 수 있는 선을 넘으면 지속하기가 힘들거든요. 사상, 정치적으로 변절한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못할 바에야 포기하는 거죠. 그래서 <불안한 어른> 책과 함께 <급진적 자기돌봄> 칼럼을 가지고 온 것인데요, 스스로를 챙김으로서 만드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기돌봄 네트워크의 가치를 조명하는 내용이어서요.


** <불안한 어른> & <급진적 자기돌봄> 독서대화


1부 보러가기.

이번 책, 어땠어요?


2부 보러가기.

- 여러분에게 서른은 상징적인가요? & 우리는 어떤 공정함을 말해야 할까요?


3부 보러가기

- 급진적 자기돌봄,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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