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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Aug 31. 2021

좋아하는 마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가장필요한 용기의모양


하고 싶은 일 vs 할 수 있는 일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 나는 중요한 갈림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안정적인 생활을 누린다. 인생을 확률 게임으로 본다.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에 매몰되기도 한다.


요즘  노력에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일을 시작한  8년쯤 지나 주위를 둘러보니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반짝이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8    있는 일을 선택했을 그들을 걱정했다. 먹고사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 고생을  해봐서 그렇다고, 믿을 구석이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정의  번째 허들은 언제나 <돈이 되는가> 였다. 일단 돈이 되어야 지속 가능하니까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꿈꿨다. 하루 종일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돈이 되지 않는  시작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돈이 되지 않는  돈이 되는 순간이 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나에게 돈이 되는 일은 회사였고 돈이 되지 않는 일은 글이었다.


한 달 전 <읽히는 글을 쓰는 방법>이라는 글을 썼다. 지금까지 쓴 글 중 꽤 반응이 좋은 글이었다.

요약해보면 이런 내용이다.


1.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2. 내공을 쌓아서

3. 꾸준히 기록하라


채소 생활을 즐기는 기록이 쌓여서 <매일매일 채소롭게>라는 채소 에세이를 출간한 나의 경험을 예시로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돈이 되게  능력은 없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꾸준히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과 돈이 되는  사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을 , 좋아하는 일은 쉼이자 놀이였다. 어차피 돈이 되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만큼 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좋아하는 일이 돈이   말듯하는 느낌을 받은 부터였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조금씩 야금야금 좋아하는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멈추고, 남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쓰고 있었다. <읽히는 글을 쓰는 방법>은 그런 점에서 자기기만적인 글쓰기였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꾸준히 쓰라는 글을 쓰면서 정작 나는 남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조각조각 기워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습관처럼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그 방법 덕분에 지금까지 문제없이 잘 살아왔으니까. 인간이 완벽해질 수 없는 이유가 '경로 의존 성향' 때문이라고 한다. 더 좋은 길이 있는 걸 알면서도 익숙한 길로 가려고 한다.


익숙한 길은 아는 길이다. 직접 경험한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다. 실패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다시 노력에 배신당할 수는 없다. 결국 돈이 돼야 지속할 수 있는 거라는 마음속 소리를 외면하기로 했다. 이건 진짜 목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마음 안쪽 벽에 두껍게 쌓아 올린 허들을 허물어야겠다. 바리케이드를 허물고 저 안 깊숙이 숨어있는 좋아하는 마음을 다시 끄집어내야겠다.


그래서

읽히는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고 집에 돌아와 읽히는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한다고 회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게 맞을까? 아닐 것 같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글쓰기 재능이나 글을 쓸 시간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을 쓸 용기가 필요했다.



좋아하는 게 없다는 고민


친구들이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좋아하는 게 있어서 부러워. 나는 퇴근하고 뭔가를 할 에너지가 없거든. 그 피곤함을 이겨내고 꾸준히 할 만큼 좋아하는 게 없는 거지. 좋아하는 걸 찾을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주어진 일을 명확하고 똑 부러지게 해낸다. 단기 목표에 성과를 잘 낸다. 학생 때는 주로 벼락치기를 해서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결과가 있어야 뛰어든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하고 싶으니까 해본다는 식의 태도는 이들에게 가장 답답한 일이다.


좋아하는 일은 표면적으로 보면 언제나 손해 보는 일이다. 투자한 시간 만큼 결과물을 얻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외 없이 그렇다.


좋아하는 일을  때에 어쩔  없이 거쳐야 하는 시기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건너려면 목표를 생각하면  된다. 차라리 눈을 감고 걷는  낫다. , 일정한 속도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중간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잡담도  나누고, 지치면 쉬었다가 다시 걷다 보면 어느샌가 끝이 보인다.  여정에서 '언제 끝이 나오지?' 생각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끝이 없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해버리는  낫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어도 해보려면 그만큼 좋아하는 일이어야 한다. 좋아하는 게 없다는 마음을 파고들어 보면 정말 좋아하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에 뭔가를 자꾸 바라기 때문에 뛰어들지 못하는 것 같다.


취미가 일이 되면 힘들어진다는 말도 같은 이야기다. 좋아서 시작한 글쓰기에서 자꾸만 뭔가를 바라는 내 마음도 그랬다.




나를 마주할 용기


밑미에서 무료로 진행한 <메타인지 강의>를 들었다. 풀리지 않던 생각의 다음 매듭이 스르르 풀렸다. 마법 같은 타이밍이다. 그동안 내가 만든 '결과물'에 집중하면서 '나'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밑미 <메타인지 강의> 정리노트, 도움이 될까 싶어 공유합니다.


나에게는 꽤나 기특한 가면이 있다. 처음 가면을 쓴 것은 회사였다. 가면을 쓴 나는 이런 모습이었다. 위로부터, 옆으로부터 요청받은 일을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나이스 하게 수행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앞에서 '그 정도 무례함으로 나를 흔들 수 있나 봐.' 가볍게 비웃으며 신속하고 명확하게 결과물을 전달해버리는 사람.


이 가면을 쓰기까지 5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면을 쓸 능력이 없었을 때, 나는 너무나도 쉽게 자주 무너졌다. 사회 초년생 시절, 부족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맞지 않는 무거운 가면을 짊어지고 다녔다. 타인의 평가와 비판에 흔들렸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욕먹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들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일이 손에 익기 시작하면서 가면이라는 걸 손에 쥐게 되었다.


가면은 신세계였다. 운 좋게 훔친 투명망토 같았다. 가면 속에서 무례한 상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도 가면 밖으로는 평온한 호수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 정도로 내가 흔들릴 줄 알았어? 어림없지.' 평정심을 유지한 채 적정선에 맞춰서 일했다.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만큼 일하고, 관계 맺고, 거리를 유지했다. 일 속에 성큼성큼 들어가기보다는 평행선의 각도가 흐트러지지 않게 선을 바로잡으며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날렵한 평행선이 완벽하게 평행을 유지하면 할수록 공허했다.


일이라는 게 이렇게 원래 공허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마음속에 에너지가 많은 사람인데 그걸 표현할 공간이 없었다. 어딘가는 쏟아내야 했고 회사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눈물을 쏟아내던 첫 직장을 그만두면서 다시는 회사에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나답게 일할  있는 회사를 찾지 못한  아니라 회사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회사 안에서 일에 대한 기대를 갖지 못한 것은  이유였을 것이다.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일하는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쿨함 가지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노력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앞으로도 옆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는  받아들일  없었다.


그 가면이 이제 회사뿐 아니라 일상 전반을 뒤덮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 내던져버리고 울고 싶어졌다. 가면을 쓰는 게 벗는 것보다 익숙해져 버려서 친구를 만날 때도, 가족 앞에서도, 심지어 나를 드러내는 글을 쓰면서도 가면을 벗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면 속 얼굴이 기억나긴 할까? 가면 쓴 모습이 내가 되어 버린 것 아닐까?


어디로든 나아가려면 이 가면을 돌려줘야겠지. 다시 맨 얼굴로 세상에 나가야겠지. 하고 싶은 일에 무모하게 뛰어들고, 좋아하는 일로 밤새 설레고, 그 일은 동의할 수 없다고 맞서 싸우고, 내 의견을 설득하기 위해 달려들고, 그러다가 비난을 받고, 실망을 하고, 그 과정에서 운 좋게 생각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겠지. 그에게 의지하고, 신뢰하고, 마음을 다해 손잡고 달리다가 등을 돌리기도 하겠지.


회사생활을 시작하던 25살, 그때처럼 또다시 할 수 있을까? 이번엔 안 무너질 수 있을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약해서 나를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다른 건 그 다음의 문제였다.


무모하고 나약했던 25살을 다 잊은 채로 8년이 지났다. 단단하게 만들어 쓴 가면 덕분에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 외면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일, 일의 의미, 하고 싶은 일을 돈으로 만드는 법,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법.


욕심이 났다. 몸을 앞으로 움직여 손을 뻗었다. 손을 조금 더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휙 어깨를 잡았다.


"잠깐, 여기서부터는 가면을 놓고 가야 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다울 수 있는 '용기'였다. 맨 몸으로 다시 걸어가 볼 용기.




저 멀리 반짝이던 기억


용기를 내야 한다고 용기 없이 되뇌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평소처럼 회사 일을 했고, 운동을 했고, 아침저녁으로 명상도 빼먹지 않고 했다. 가슴 한편이 답답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쯤은 곧 괜찮아지거나 익숙해질 거니까 견딜만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시간 나면 읽으려고 저장해둔 글을 읽었다. 좋아하는 걸 마음껏 좋아하는 누군가의 일기였다. 그 열렬한 마음을 읽고 나자 아차, 잊고 살았던 반짝이는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 좋아하는 걸 무모하게 좋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차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돈이 안 될까 봐,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그 마음 위로 벽돌을 꾹꾹 눌러두었다.


이제 맨 몸으로 다시 걸어가 그 벽돌을 하나씩 끄집어낼 때가 왔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되찾지 못할 것만 같다.


용기.


좋아하는 마음에는 정말이지

용기가 필요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자 랜덤 메시지 카드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눈을 감고 한 장을 뽑았다. 정말 선물처럼, 나에게 필요한 문구였다.

정말로 명상적인 사람은 장난스럽다. 그에게 있어 삶은 재미이다. 그에게 삶은 하나의 놀이이다. 그는 삶을 엄청나게 즐긴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는 이완되어 있다. -oh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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