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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an 14. 2023

남는 게 있는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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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네

왜 이 책 읽은 것 같지?


2021년 여름이었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 <어른 없는 사회>를 반쯤 읽다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 문장 왜 읽어본 것 같지?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니까 비슷한 내용을 다른 책에서 읽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몇 달 후 독서 노트를 정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4년 전에 같은 책을 읽었던 거다. 저장해 둔 사진을 보고서야 기억이 났다. 버스에서 책을 읽다가 너무 와닿는 문장을 발견하고 급하게 사진을 찍었었다.


2017년 10월 3일. 에버노트에 남긴 기록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2021년 여름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늘어놓는 거야?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면서부터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이 책은 메모도 남기지 않겠어!” (우치다의 팬이 많은 것으로 안다. 개인의 취향일 뿐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 그런데 2017년 독서 노트 속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의 문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니.


몇 년 사이 생각이 바뀐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공감하면서 읽어놓고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다니,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소중한 시간과 집중력이 이렇게 아깝게 소모되다니…! 고백하자면 이런 경험은 이 책 말고도 더 있었는데 이 날은 완전히 바뀌어버린 감상 때문에 더욱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날부터 독서법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기억에 남는 독서, 어떻게든 내 안에 남아 내 일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독서를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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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필사의 한계


그동안 고수해 온 독서법은 밑줄과 필사였다. 책을 앞장부터 뒷장까지 술술 읽어가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거나 북마크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해 두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시해 둔 문장을 타이핑해서 에버노트에 저장해 두었다. 5년 넘게 유지할 만큼 꽤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필요할 때 검색만으로 간편하게 읽었던 책의 주요 문장을 찾을 수 있어서 글을 쓰며 내용에 살을 붙이고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의외로 기억에 잘 남지 않았고, 필사한 문장이 워낙 많고 길어서 다시 읽는데도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했다.


밑줄 긋고 필사하며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에버노트에 쌓인 300개의 독서 필사 기록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안 나는 필사 기록에 압도되기도 했다.



읽었던 책 내용을 기억에 잘 저장해 두고, 나중에 꺼내봤을 때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기록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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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맵으로 구조 그리기


여러 권의 독서법 책을 읽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에세이를 탐구하며 내가 찾은 방법은 <마인드맵>이었다. 마인드맵을 선택한 이유는 쉽고, 간단하고, 가장 효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마인드맵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로, 방대한 내용에서 중요 키워드를 추출한 다음 세부 키워드로 뻗어나가거나 키워드끼리 서로 연결하는 생각 구조 설계도다.


마인드맵으로 정리한 책 <정리하는 뇌>


마인드맵을 그리면서 책을 읽을 때 신기한 신체적 경험을 했다. 뒤통수 윗부분에 뜨겁게 열이 나고 간질간질하게 머리 안에서 뭔가가 활성화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나중에 뇌과학 책을 읽으면서 뇌의 특정 부분이 실제로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인드맵을 그리려면 중요 키워드가 무엇인지 찾아내야 하고, 키워드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뇌가 전에 하지 않던 노동을 하기 시작한 거다. 마침내!


마인드맵은 적극적으로 깊이 고민하며 읽게 만든다. 페이지 순서대로 물 흘러가듯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작가의 주장이 근거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개념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계속 분석해야 마인드맵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부가 직업이라고 말하는 정희진 작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독서를 그냥 즐기면 남는 게 없다. 습득하면서 동시에 의심하라. 그러면 모든 내용이 자극이 되고 내 안에 남는다. 푹 빠져서 읽지 말고 내 관점에서 읽으라.


요즘 청년들의 선생님으로 불리는 유현준 교수도 이렇게 말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게 아니다. 질문을 하면서 읽어야 한다.


밑줄 긋고 필사하며 책을 읽던 나는 “책을 많이 읽는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에버노트에 독서노트가 하나씩 쌓이는 것을 보면 지식 자본이 쌓여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뿌듯한 기분만 쌓았던 거다.



독서 기록에 최적화된 마인드맵을 찾고 싶어서 여러 프로그램을 사용해 봤다. 엑스마인드, 알마인드, 윔지컬과 같은 디지털 프로그램도 써보고  손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지금은 이렇게 정착했다.


손 마인드맵 → 나의 생각 구조화

디지털 마인드맵 →  남의 생각 구조화


내 생각을 정리할 때는 뇌에 정보가 방사형으로 규칙 없이 늘어져있는 형태 그대로 뇌를 스캔하듯 손으로 자유롭게 정리한다. 생각나는 대로 적는 자유연상기법과 비슷하지만 연관된 키워드와 연결하며 적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독서 노트처럼 남의 생각을 정리할 때는 디지털 마인드맵 ‘윔지컬’을 사용한다.


윔지컬로 정리한 마인드맵 독서노트


남의 생각을 이해해야 할 때는 생각의 구조를 계속 변형해 가며 내용을 업데이트하기 때문에 키워드 간의 관계와 위계가 달라진다. 읽어나가면서 계속 키워드의 위치를 바꾸게 되기 때문에 손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수정과 이동이 편리한 디지털 마인드맵이 편리하다. 여러 디지털 마인드맵 중 ‘윔지컬’을 사용하는 이유는 노션에 바로 붙일 수 있고, UI가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세련되어서다.


여전히 밑줄 긋기와 필사를 한다. 마인드맵은 설계도이기 때문에 좋았던 문장을 기록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은 이전처럼 에버노트에 저장해 둔다. 마인드맵을 사용하면서부터는 필사한 문장의 양이 줄었다. 이전에는 중요한 내용을 모두 필사했다면 이제는 원문 그대로 나중에 써먹을 문장만 기록하기 때문이다.


마인드맵을 쓰면서 책 읽는 순서도 달라졌다. 이전과 다르게 페이지 순서대로 읽지 않고 왔다 갔다 읽게 된 거다. 전체 맥락을 수시로 파악하고, 지금 읽는 부분이 전체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다. 주로 이런 순서를 거친다.   


1. 시작하는 글과 마치는 글을 먼저 읽는다. 작가가 이 책을 왜 썼는지 알 수 있다.

2. 목차를 꼼꼼히 읽는다. 가구 조립 전 설명서를 읽는 것과 같다.

3. 빠르게 책장을 넘기면서 휘리릭 본다. 글자를 읽는 건 아니고 책이 어떻게 편집되었는지, 관심 있는 부분의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대충 본다.

4. 이제 제대로 읽기 시작한다. 마인드맵과 밑줄, 필사를 적극적으로 한다.

5. 한 챕터를 읽을 때마다 목차를 보면서 이 내용이 구조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한다.

6. 한 파트가 끝날 때마다 전체 마인드맵을 다시 본다.

7. 끝나고 나면 나만의 감상을 세 줄 정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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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로 감상 남기기


책을 다 읽고 나면 꼭 나의 언어로 감상을 남긴다. 나의 언어로 기록해 두어야 책 내용이 비로소 나의 생각 질서 안으로 편입된다. 최소 세줄을 목표로 한다.


책 <벌새>를 읽고

<벌새>는 1994년, 16살 은희의 이야기다. 시대적으로 10년 즈음 차이가 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장면과 감정을 은희에게서 떠올렸다. 그 시절에 가정과 학교는 권위와 억압을 재생산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조용하고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착한 아이인 척 가면을 쓴 채 권위와 부조리에 분노하는 두 얼굴의 아이였다.

요즘 학교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구호와 장소가 대체되었을 뿐, 여전히 사회에는 집단몽이 존재한다. 그 집단몽을 유지하기 위한 권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학교, 가정, 선생님, 권위... 이 자리에 지금은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돈 밖에는 명확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책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읽고 적용한 것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말을 배운다. 신조어나 전문용어가 아니라 '일상 어휘'를 배운다. 책을 읽다가 몰랐던 단어를 마주치고 사전을 찾아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이런 개념과 상황을 설명해 주는 언어가 있었어?

언어는 생각을 설명해 주는 도구인 동시에 생각을 열어준다. 언어는 생각을 완벽하게 담을 수 없지만 그 어긋난 빈틈이 때로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책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읽다가 도전, 응전, 분투라는 세 단어를 한 문장에서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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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바로 적용해 보기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더 좋은 삶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더 유쾌하고, 여유롭고, 낭만 있는 삶을 위해 읽는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나면 그전보다 내 삶이 조금은 더 괜찮아진 기분이 든다.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아주 사소하게라도 내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본다. 그리고 바로 실천해 본다. 한 번 하고 그만둔다고 해도 ‘직접 한 번 해봤다!’는 감각은 아주 적극적이고 강렬한 감각이라서 쉽게 잊히지 않는다.


책 <피크 퍼포먼스>를 읽고 적용한 것

→ 충분한 잠이 생산성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게 되었다. 6:30에 맞춰진 알람을 지우고 7:30으로 바꿨다.


책 <핑크 펭귄>을 읽고

→ 준비하던 포트폴리오 강의 자료를 수정했다. 포트폴리오란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으로 “이런 사람 필요하시죠? 그게 접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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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을 이렇게 읽을 필요는 없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요? 그냥 책 안 읽을게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방법이다. 모든 책을 이렇게 읽을 필요는 없다. 나 또한 이 방식으로 읽는 책은 한 달에 한 권 정도다. 편안한 마음으로 밑줄 긋지 않고 필사도 하지 않고 읽는 책도 많다. 읽다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만두고 다른 책을 읽기도 한다. 나의 독서 목표는 완독이 아니라 정독이다. (바를 정이 아니라 마음 정이다.)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읽을 때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 좋아서 밑줄을 긋다가 이러다간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을 것만 같아서 그냥 편하게 푹~ 빠져서 읽었다. 정희진 작가는 이렇게 읽으면 남는 게 없다고 했지만 너무 좋아하며 읽으면 그래도 마음에 남는다.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강렬한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위의 프로세스로 읽는 책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설명하는 정보 전달 위주의 책이다. 책의 핵심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기억해야 할 때에만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모두 켜고 공부하듯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읽는다.


정리하자면, 지식을 전달하는 책은 그 지식이 필요해서 읽는 것이므로 좋았던 감각만 남기면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책이 설명하는 개념의 구조와 내용을 정리하며 읽는다. 그보다 더 자주 읽는 책들은 작가의 문체와 분위기, 감각이 좋아서 읽는 책이다. 축 쳐진 마음에 물을 주고 싶을 때 읽는 책이랄까. 그런 책들을 느슨하게 읽는다. 그래도 된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마음으로 해야 오래 지속할 수 있다.




아래는 느슨한 마음으로 푹 빠져 책 읽는 시간의 기록이다. 그런 기록은 사진으로 남겨두면 더 오래간다.


서교동 카페 <앤트러사이트>에서 정원뷰 커피를 마시며 책 읽기
모과생강차를 마시며 따뜻한 마음으로 읽었던 <괄호가 많은 편지>
큭큭 거리며 읽었던 귀여운 책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던 책 <퇴사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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