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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Mar 25. 2023

나는 나를 보고 배운다


나는 나를 통해 배운다


“너 누구 보고 배웠니?”

드라마 대사에서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그러게. 습관, 생각, 감정처럼 나를 이루는 것을 나는 누구한테서 배웠을까? 부모님? 학창 시절 선생님? 친구?


요즘 드는 생각은 나는 나한테 제일 많이 배운다는 거다. 나의 실패로부터, 성공으로부터, 기쁨과 충만함, 좌절과 패배, 배신과 화해, 용서와 사랑으로부터 나는 항상 나에게 배우고 있다.


나는 타고난 몸치다. 몸으로 하는 일은 모두 자신이 없었는데, 5년 넘게 요가를 하면서 요가 시간만큼은 몸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다.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 탓에 사람을 만나는 일을 힘들어하고, 못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 밖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사람을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안 맞는 사람과 일할 때 남들보다 에너지를 많이 뺏기는 성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지작 거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안타깝게도 “예쁘게 만드는 것”에 소질이 없었다. 유치원에서 빈 요구르트병, 우유갑을 가지고 와서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 말도 안 되는 창조물을 만드는 게 6살 때의 취미였다. '어른이 되면 발명가가 될 거야, 예술가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좋아하는 마음과 달리 외부로부터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반복해서 받았다. 학교 선생님들은 자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공부는 잘하면서, 손재주는 없구나?” 여러 번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스스로에게 알려줬다. “난 손재주가 없어.”


어느 순간부터는 손으로 하는 것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흥미도 떨어졌다. 그룹 과제로 그림을 그리거나 손글씨를 써야 하면 “나는 자료 조사를 할게.”라고 말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미적 감각이 훈련 기회까지 잃은 것이다.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은 전부 못 한다고 생각했다. 옷을 잘 입는 것이 어려워서 친구들이 사는 옷을 따라 산 적도 많고, 화장도 잘 못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눈화장을 아예 포기했다. 감각적인 블로그를 꾸미는 것도 못하고, 파워포인트도 못 만들었다. 내가 만든 파워포인트는 부장님 감성이 물씬이라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웠다. 프로모션 디자인 기획 시안을 만들어 상사에게 공유하면 “흠…” 난감한 반응을 자주 받았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게 참 신기하다. 웹에서 모바일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간단하게 보기 좋은 문서를 만들 수 있는 툴이 나오기 시작한 거다. 네이버 블로그에 스마트 에디터가 도입되면서 미적 감각이 없어도 그럴싸한 포스팅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파워포인트를 쓰지 않고, 노션으로 뚝딱뚝딱 텍스트와 이미지만 넣어서 보고서를 만든다. 도형 몇 개만 조합해도 세련되게 디자인을 구현해 주는 피그마 figma 덕분에 남 부끄럽지 않은 디자인 시안을 만들 수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내가 만든 문서에 이런 피드백이 돌아온다.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보기가 편하다." 워낙 시각화에 자신이 없다 보니 진짜 중요한 핵심만 큼직큼직하게 정리하는데, 그게 오히려 보기 좋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고난 똥손인 내가, 취미로 하는 베이킹을 보고 사람들이 금손이라고 칭찬을 한다. 어릴 적 나였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비밀이 있긴 하다. 내가 하는 베이킹은 간단한 재료를 섞기만 하면 완성되는 원볼 비건 베이킹이다. 게다가 주로 틀에 넣어 굽는 메뉴를 만든다. 틀에 넣어 구우면 반죽을 틀에 알맞게 붓기만 해도 모양은 알아서 잡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미적 감각이 없어.”라던가 “손으로 하는 건 잘 못해.”라는 생각은 잘하지 않게 되었다. 몇 번의 피드백을 받고 <나>와 <미적 감각 없음>을 연결시킨 것도 나 스스로이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나>를 <알고 보니 툴을 잘 활용하고 시각화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다시 인식하게 된 것도 나 자신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한계선을 긋고 그 안에 스스로를 방치했었다. 칭찬만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새로움을 시도했다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해봤던 것, 잘하는 것만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계속 변하고, 무엇보다 세상이 엄청나게 빠르게 바뀌고 있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을 중심에 놓고 10~20%의 새로움을 시도하다 보면 나도 몰랐던 <의외의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오? 나 이런 것도 할 줄 아네? 이거 재밌네?" 새로운 발견은 나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나에 대해 새롭게 배우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배운 것들


나는 남편을 통해서 ‘사랑’을 새롭게 배우기도 했다. 시댁 식구들은 습관처럼 사랑한다고 말한다. 안녕, 반가워, 잘 가, 이런 인사를 하듯이. 그런 가정에서 자란 남편은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안 좋아할 거야.”라는 생각을 고정값으로 가지고 있었다. 친구를 사귀고 동료들과 일을 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도록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참 애를 많이 썼다. 남편과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면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할 거야.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정도로 생각이 바뀌었다. 관계를 맺기가 편해졌다.


매일 루틴을 반복하면서 스스로에게 가르쳐주고 배우는 것도 있다. 정성스럽게 아침을 차려 먹으면서 좋아하는 음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 내내 기분이 좋고 스트레스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잠들기 전에 일기를 쓰고 하루치 감정을 정리하면 편하게 잠들고 다음날 하루를 개운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먹어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일이 너무 많아서 압도될 때 오히려 잠깐 일에서 빠져나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잠깐 쉬었다가 돌아가면 능률이 더 오른다는 것도 배웠다. 사이가 어색해진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 생각보다 반갑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도 어른이 되어서 배운 것이다.




나는 나를 모르고, 그래서 더 배울 수 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다가도 모르겠고, 바뀌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생각했다.

"의도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배우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계속 배운다. 어른이 되면 머리가 굳는다는 말은 잘못된 사실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코로나로 재택근무, 유연근무가 발 빠르게 일상화되면서 루틴, 습관 형성이 인기를 끌었다. 습관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는 언제 발을 페달에 올려야 할지, 핸들을 얼마큼 조정해야 할지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생각을 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페달을 밟고 핸들로 방향을 조정하며 나아간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뇌에게 자전거 타기를 배우듯 ‘새로운 나’를 학습시킬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반복하면 머릿속 회로에 그 생각의 길이 골짜기처럼 깊게 파인다. 아침에 “확언 일기”를 쓰고, 잠들기 전 “감사 일기”를 매일 반복해서 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창 업무량이 많아 일에 압도되던 때 아침마다 반복한 확언은 이 두 개다.   

나의 하루는 온전히 나의 주도로 흘러갈 것이다.

매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100명의 사람들이 내가 잘되기를 응원한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면서 뒤늦게 소진되는 기분을 느꼈을 때 반복한 확언도 소개한다.   

오늘 나의 하루에는 새롭고 뿌듯한 일들이 가득할 것이다.


매주 일요일 저녁에는 다음 주 확언을 정한다. 월요일 아침이 되면 확언 문장을 weekly 일기장 머리말에 크게 써둔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아침마다 반복해서 입으로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일을 하다가 짜증이 날 때 확언 문장을 떠올린다. “매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100명의 사람들이 내가 잘 되기를 응원한다.” 그러면 다시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끊임없이 스스로 배울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위안이 된다. 아직 더 배울 게 남았고, 더 많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처럼 느껴진다.




내가 나의 딸이라면


내가 나의 딸이라면, 나는 딸에게 (나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가. 어떤 것을 알려주고 싶은가. 내가 나의 딸이라면 안 그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상 속에서 더 해내야 한다고 가혹하게 밀어붙이지 않을 것 같다. 동시에 될 대로 되라며 침대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살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잘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무리하게 채찍질하지도, 무신경하게 방치하지도 않고 싶다.


일과 삶에 압도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나의 딸이라면, 지금의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은가.


한껏 감상적일 때에는 ‘내가 나의 딸이라면’이라는 가정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기도 한다. ‘내가 남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 마치 다른 누군가의 사연을 읽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에게 공격적인 피드백을 들었을 때, 타인의 시선으로는 별거 아니지만 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 아스팔트 도로 위에 엎어져 살이 쓸렸을 때처럼 아플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안전지대’가 필요하다.




안전지대로 나를 데려다 놓기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줄 안전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은 ‘내 방’처럼 물리적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촘촘하고 따뜻한 관계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는 강력한 안전지대다. 회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도 변함없이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줄 친구, 동료, 가족이 굳건히 내 뒤에 버티고 있어 줄 때 우리는 넘어져도 무너지지 않는다. 눈을 감고 뒤로 넘어져도 받아줄 누군가가, 당신에게는 있는가?


나에게 안전지대는 리추얼 메이트와의 관계이다. 내가 쓰는 글은 세 종류이다.   

혼자만 보는 글

서로 믿고 아끼는 리추얼 메이트에게만 공개하는 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SNS에 업로드한 글


혼자 묵혀두고 천천히 숙성시켜야 하는 마음이 있기에 모든 글을 남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 반면 어떤 글은 나의 콘텐츠와 커리어를 알리기 위해 더 널리 공유될수록 좋다. 문제는 혼자만 보는 글은 타인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에 흔들리기가 쉽고, 모두에게 공개된 글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 가볍게 읽고 오해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소수의 지지 그룹이다. 나에게 그 지지 그룹은 리추얼 플랫폼 [밑미]에서 함께 공부하는 메이트이다. 리추얼 메이트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규칙이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의심을 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지지와 공감만을 보낼 것.”


누군가를 무조건 응원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보면, 그 사람의 상황이 보인다. 지금 얼마나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알고 나면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안전지대 안에서 마음 놓고 나는 나에게 배울 수 있다. 따뜻한 지지와 응원이 기본값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게 된다. 잘한 게 있다면 칭찬을 주고받으면서 강화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진짜 속마음은 무엇이었는지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다. 안전하다는 감각 덕분에 일부러 포장하거나 감추지 않게 된다. 자연스러운 나를 드러낼 수 있어야 무언가를 배울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아이가 어른을 보고 배우는 것처럼 나는 나를 보고 배운다. 어른들이 아이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것처럼, 내가 보고 배울까 무서운 행동을 하지 않는지 돌아본다. 나는 나의 딸이자, 보호자이며, 친구이자, 학생이다. 낯선 관찰자이자 다정한 동반자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자주 생각해 본다.


나는 어제, 그리고 오늘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을까? 무엇을 배웠을까?



함께 공부해요!

[밑미] 하루 30분 공부 리추얼

https://www.nicetomeetme.kr/rituals/01gf9864n6qebcwr8apq5k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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