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다양한 식이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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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건은 아니다. 다만, 고기보다 채소를 좋아한다.
혼자 살다보니 채소를 먹을 일이 줄어들었다. 몸은 필요한 영양소를 '먹고 싶다'라는 느낌으로 표현한다. 채소가 먹고싶어졌다. 평일에 회사에서 탄수화물 위주의 점심을 먹는다. 아침은 허겁지겁 출근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먹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 퇴근후 저녁, 그리고 주말만이라도 채소를 의식적으로 먹는 습관을 들였다.
싱싱한 채소는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그렇다고 매번 생채소만 씻어 먹을 수는 없다. 채소를 더 맛있고 건강하게 먹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채소 요리 레시피를 모으게 되었다. 채식 요리책을 사서 열심히 봤고, 유투브로도 정보들을 찾아봤다. 나는 뭐든 관심을 갖게 되면 제대로 공부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처음 시작은 건강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채식, 비건, 키토식(저탄고지) 등등 건강식과 관련된 다양한 식이법을 찾아봤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식이법이 있었다. 먹으면 안 된다는 음식은 뭐 그렇게 많은 건지, 성분부터 조합, 조리법 등등 머리가 아파왔다.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엄격한 법칙에 따라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거지? 그냥 건강하게 만들어진 재료들을 건강하게 조리해서 적당히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건강식이법들의 공통점은 '특정 재료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No 탄수화물
건강식이법 중에서 가장 먼저 한계에 부딪힌 것은 저탄고지 (저탄수화물 고지방) 였다. 일상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베이킹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베이킹은 기본적으로 가루재료에 지방이나 수분을 섞고, 당을 첨가해서 만든다. 대표적인 가루재료인 '밀가루'는 탄수화물이다. 저탄고지의 적이었다. 대채 재료로 아몬드 가루나 코코넛가루가 있었지만, 아직 다양한 레시피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식감이나 맛에서 표현의 한계가 있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전보다 달콤한 디저트가 덜 필요해지기는 했지만, 밀가루 베이킹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저탄고지의 또 다른 큰 장벽은 조리와 설거지였다. 혼자 사는 사람 중에서는 집에서 절대 고기를 굽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온 집에 기름이 튀고, 설거지를 해도 미끌거리는 접시, 마리네이드 등등의 전처리 과정이 번거로웠다. 물론 간편하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사 먹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모든 이유들을 뛰어넘을 만큼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회사 점심이나 친구들과의 약속에서 먹는 고기만으로 충분했기에, 따로 고기 요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저탄고지를 떠나보냈다. 고기를 끊은 것이 아니기에, 이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No 글루텐
재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 '글루텐 프리'라는 설명은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건강해보였다. 글루텐 프리 베이킹 수업에서 글루텐 프리 식이의 정체를 알았다. 이 세상에는 글루텐을 소화할 수 없는 체질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늘 약한 위장으로 고생을 하고 살지만, 글루텐을 소화시킬 수는 있다.
"글루텐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글루텐을 너무 안 먹게 되면, 글루텐 소화 능력이 떨어지게 되요. 그래서 결국 글루텐을 소화할 수 없게 되죠. 굳이 글루텐을 먹을 수 있는데 제한할 필요는 없어요."
이럴수가!! 글루텐 프리는 건강한 식이가 아니라 '글루텐을 소화할 수 없는 특정 체질 맞춤 식이' 였을 뿐이다.
나는 이렇게 글루텐 프리도 떠나보냈다. 나는 글루텐을 소화할 수 있으니까.
No 동물성 재료
마지막 단계로 비건 식이를 공부했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비건은 또 뭘까 싶었다. 채식이 단순하게 '먹는 영역'에 대한 문제라면, 비건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비건은 가죽가방, 가죽신발, 가죽옷을 소비하지 않는다. 비건은 식재료를 포함해서 동물로부터 나온 모든 재료를 배제하는 꽤나 정치적, 사회적 행동이다. 즉, 동물을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착취하는 것을 반대한다.
먹는 문제만을 봤을 때는 '채식, 채식주의자'의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들은 계란, 덩어리 고기, 어패류, 생선, 치즈, 우유 등등 동물에서 얻은 모든 재료의 사용을 제한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건강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물론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채식을 통해 건강을 되찾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채식, 그리고 비건은 정치적, 사회적 가치관의 문제이다. 약자와 얼마나 공감하고 연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머리가 아주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저탄고지와 글루텐 프리를 떠나보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나는 고기를 먹을 수 있고, 글루텐 프리 빵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를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자유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물성 재료의 문제는 달랐다. 내가 건강이 아닌 '가치관'에 의해 채식을 선택한다면, 나는 절대 동물성 재료를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예외란 허용되지 않았다. 가끔 고기를 먹는 비건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체 재료로도 충분히 훌륭한 요리와 디저트를 만들 수 있다. 비건 베이킹을 배우러 다니면서, 제철 채소로 만든 놀랍도록 다양한 케이크와 과자를 맛보았다. 채소만으로도 든든한 한끼 식사를 해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 점심은? 친구들과의 만남은? 내가 가진 수많은 가죽 제품들은?
게다가 버터와 계란, 생크림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디저트가 분명 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동물성 지방으로 과자를 만들어 왔다. 비건 베이킹은 '대체 재료'를 사용하지만, 대체 재료는 기존 재료와 비슷한 화학적 기능을 가진 재료로 그 역할을 대체해줄 뿐이었다. 장르를 바꿔서 떡을 배우거나, 아주 새로운 디저트를 배워볼까 싶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완벽한 비건이 되어야 할까?
만약 그래야 한다면, 나는 채소만으로 요리와 과자를 만드는 일에 더욱 집중하는 게 맞다.
그러나 나는 10명의 완벽한 비건을 만드는 것보다 100명의 채식선호자를 만들고, 우리 사회를 좀더 비건 친화적인 사회로 만드는 것이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소수의 완벽한 비건이 비건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 도움이 절대적이다. 비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더 부드러워져야 하고, 식당들이 비건 메뉴를 좀더 추가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10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100명의 채식선호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천성적으로 '하지말라'는 말에 반항하고 싶어진다.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억압, 제한이 아니라 즐거운 문화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좀더 즐겁게 채식 선호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비건이 바라는 세상에 좀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동물을 먹는 것 자체가 아니라, 동물 재료를 싼 값에 대량생산하기 위해 동물들을 학대하는 일이니까. 동물들이 비좁은 우리와 항생제에서 자유로워지고, 우리도 먹을 거리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먹을 거리에 대한 고민은 그래서 늘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개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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