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사람들은 산으로 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도, [인투더와일드]의 크리스토퍼, [I may be wrong]의 린데블란드, [러브 포레스트] 채널의 주인공까지.
하지만 나는 다 버리고 산속으로 떠나 살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남편과 매일 비슷한 음식을 몇 가지 해 먹고, 십 년이 넘은 차로 주말이면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고, 매월 조금씩 모은 돈으로 5년 후에 살 수 있는 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음에 드는 책은 망설임 없이 사서 보고, 응원하고 싶은 브랜드가 있으면 기꺼이 구매하고, 단골 카페에서 매일 아침 과일향이 상큼한 원두로 내린 라떼를 마시는 이 삶을 계속 살고 싶다.
깨달음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산으로 가면 대단한 평화나 안정이 있을 거라는 기대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현실에 안주해 버린 사람의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가 회사를 박차고 나가 도시를 등지고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사랑과 자유가 그곳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삶은 여기에 있다. 도대체 왜 손에 쥔 것을 버리지 않고도 할 수 있다고 깨달을 수 있다고 그대로도 괜찮으니 더 가 볼 수 있다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걸까.
내가 바라는 삶은 그냥 지금처럼만 사는 것이다. 왜 자꾸 세상은 지금처럼만이라도 살려면 더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걸까. 지금처럼 회사를 오래 다니려면 더 성과를 내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내공을 쌓아야 한다고 하는 걸까.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의심이 든다. 이 악물고 아등바등 버텨서 지금, 여기이다. 물론 더 열심히 하면 더 나은 지금,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편안하지 않다면 반대로 열심히 안 사는 쪽이 더 편안함에 이를 수 있는 길 아닐까? 그냥 내 삶을 이 세상에 내맡겨버리면 내가 모르는 길이 보이지 않을까? 나는 지금 세상에 속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있던 때 두 장면을 마주했다.
인스타그램 추천 알고리즘이 나에게 7개월 전 [나 혼자 산다] 영상을 보여줬다. 35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간호과장으로 승진한 샤이니 키의 엄마가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다 잃어도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개념이 없다. 다 잃었는데 어떻게 돌아갈 집이 남아있지? 나는 다 잃으면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하루 종일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나]다.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나에게 남은 것은 나다. 절대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를 잃어버리는 결정은 하지 말자.
퍼블리 콘텐츠 앱을 켜고 가장 먼저 보이는 아티클이 박웅현 소장의 글이었다. 전 세계의 좋은 말들을 모아두면 ‘지금, 여기’ 딱 두 단어가 남는다고 한다. 본인은 최선을 다하며 살면서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이 조언 속에 내가 고민하던 답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가 추구하는 삶도 산이 아닌 삶 속에서 편안함이 이르는 것이 아닐까. 10년 간의 회사 생활 내내 회사를 버리고 나답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읽었는데 앞으로는 이런 삶을 추구하는 분들의 에세이를 읽어봐야겠다.
산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자유롭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고 싶다.
그 삶으로 기꺼이 나를 내맡기고 싶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회사를 다니며 많은 일을 해내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주 간단하고 강력한 방법이다. 이것을 알게 된 이후로 스트레스받지 않고 허덕이지 않고 끌려가지 않는 상태로, 동시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방법은 바로 "그 일을 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허무하지만 이게 전부다. 새로운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계산하고 캘린더에서 무엇을 빼서 이 시간을 넣을지 결정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그 일을 하면 된다.
단, 이 시간 계산은 정확해야 한다. 정확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 그리고 일과 일 사이 휴식 시간까지 계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투두 리스트는 도미노처럼 밀리고 무너져서 결국은 번아웃이 오거나 못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게 된다.
그러려면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얼마큼의 시간이 걸리는지, 그 일이 끝나면 얼마나 쉬어야 회복이 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내 시간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이고 감정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계획표는 아주 단순해졌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선택하고, 그것을 하기 위한 덩어리 시간을 어떻게든 확보하는 것. 그러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지 결정하고 그 뒷일을 책임지는 것. 그것뿐이다.
물론 그 뒷감당이 싫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금 내가 사는 삶은 과거의 내가 순간순간 선택한 결정들의 총합이다."
차와 베이킹을 그렇게나 열심히 배우고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내가 용기 없는 겁쟁이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고 오랫동안 꿈을 꿨으면서도 대학시절 전공을 바꾸거나, 글쓰기 수업을 받아보거나, 하루종일 글 쓰는 삶을 선택하지도 못했다.
왜 나는 매번 이렇게 선택하지 못할까,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이 컸다. 용기 있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에 베팅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들을 멋지게 해내는 열정적인 직장인이 되지도 못했다. 나는 그 어떤 선택에도 올인하지 못했다. 11년째 일이 재미있었다가 상사의 인정에 목을 매다가 지쳐 나가떨어졌다가 의미도 성장도 없이 무료해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어째서 나는 과감하고 끈기 있게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못할까.
그러나 어떤 고민이라도 진지하게 오래 하다 보면 새로운 출구가 보이기 마련이다. 일상의 반복, 올인의 회피, 선택의 유보, 그럼에도 여전히 꾸는 꿈에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이 삶을 유지한 채로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거다. 에이 지겨워하며 두 손 탁탁 털고 산으로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일에 나를 온전히 바치고 싶지도 않았다. 삶이 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일이 삶을 추동하며 일과 삶이 돌고 도는 상태, 그 나선형의 파도 위에서 신나게 서핑을 하고 싶었던 거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을 타고 쉽고 가볍게 말이다.
회사 동료 A와 무서운 놀이기구를 잘 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저는 어렸을 때는 무서워했는데 몇 년 전부터 롤러코스터를 잘 타게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놀이기구를 잘 탔던 사람, 잘 탔지만 나이 들어 못 타게 된 사람은 봤지만 나이 들어 잘 타게 된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놀이기구 공포증을 이겨냈는지 물으니 "제가 안 가려고 하니까 무서웠던 거였어요. 그냥 기구가 가는 대로 제 몸이 따라가게 내맡기니까 괜찮던데요?"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나도 수없이 놀이기구에 나를 맡겨보려고 했지만 몸속 장기가 쿵하고 떨어지는 그 기분이 너무 싫고 무섭던데.
얼마 뒤 오랜만에 일산까지 운전할 일이 생겼다. 운전면허는 10년 전에 땄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벌벌 떠는 탓에 11년째 초보 딱지를 못 뗐다. 운전하기 며칠 전부터 고속도로 운전할 생각에 잠에 들 때마다 어쩌지, 긴장이 되었다. 대망의 운전날 아침, 갑자기 A의 말이 떠올랐다. A가 롤러코스터에 자신을 내맡긴 것처럼 나도 차에 나를 맡겨보면 어떨까? 지금까지 내가 운전을 무서워했던 건 내 몸의 속도보다 빠른 차의 속도를 무의식이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10분 동안 이 문장을 반복하며 명상을 했다.
"나는 나아간다. 차를 타고 차의 속도로 나아간다. 나는 안전하다."
명상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대를 잡는 그 순간, 무언가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했다. 마음이 편안한 거다! 여전히 주차를 하려면 몇 번이나 차를 넣었다 빼야 하고 고속도로 위에서 천천히 달리는 나를 비켜가느라 뒤차들이 분주하게 내 주변에서 움직이지만 분.명.히. 달라졌다. 운전할 때마다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던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은 한 번도 입술을 깨물거나 물어뜯지 않았다. 편안했다.
A가 알려준 내맡김은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방법을 내 일과 삶에도 적용해보고 싶어졌다.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내가 쓰지 않으려고 하면 장애물이 된다. 내가 앞으로 가려는 마음이 없으면 롤러코스터도, 차도, 일도, 삶도 나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 위에 올라 그 흐름에 나를 맡기면 두려움과 괴로움, 고통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일을 떠나 나를 찾는다고 내가 찾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냥 일의 파도를 타면 그 과정이 [나]인 것이다. 일을 싫어하고 부정하고 피할수록 일은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황선우 작가가 쓴 책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의 부제 '목숨 걸지도 때려치우지도 않고 일과 나 사이에 바로 서기'처럼 말이다.
20대 내내 글 쓰는 직업을 갖지 못하는 것이 늘 아쉬웠다. 글만 쓰고 살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텐데 글로 먹고 살만큼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나 사실 그 마음은 거짓이었다. 기꺼이 글에 20대를 바칠 수도 있었다. 못 먹어도 가보자고 나를 던져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었다. 이왕이면 많이, 안정적으로 꼬박꼬박, 덜 힘들게 벌고 싶었다.
나에게는 글보다 더 중요한 삶이 있었던 거다. 글은 내 삶이 아니었다. 글은 내 삶을 담아내고 나를 이어주는 도구다. 삶이 먼저 있어야 글이 있다. 글을 위한 삶, 내 글의 무대이자 장면이고 주인공인 내 삶이 먼저 있어야 했다. 이 마음을 시원하게 인정하고 나니 차분하고 편안해졌다.
나는 왜 두 번째 책을 못 내지? 이 생각에 한참이나 괴로웠다.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쓴 사람이 목표였고 그 길은 예외 없이 불행으로 가는 고속도로였다. 내 안에 이야기가 쌓여서 넘쳐흐르면 그것은 반드시 글이 되고 책이 된다. 그때까지 기다리며 묵묵히 계속 쓰는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이 쌓이다 보면 글보다 먼저인 삶 덕분에 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글이 될 것이다. 우선 삶을 제대로 살아내고 볼 일이다. 나 자신으로 제대로 살기 위해 내 일을 제대로 하고 볼 일이다. 글로 먹고살지 못해 선택한 지금의 일을 제대로 하다 보면 그것이 글이 될 것이다. 일단 지금에 충실하라는 말은 언제고 누구에게고 빗나가지 않는다.
먹고사는 일의 위대함을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크게 느낀다. 아니, 오히려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겠지. 현실과 꿈 사이에서 유영하는 나를 지탱해주는 무게 중심이 먹고사는 [일]에 있을 테니까.
신입사원 시절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진 긴 방황은 끝내 회사를 떠나는 선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길 위에서 오히려 지금 하는 일에 충실해보자는 선택을 내 손으로 하고 있다. 10년 만에 제대로 일을 시작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다니, 무엇이든 오래 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