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책 컨티뉴어스를 읽었다. 윤소정의 생각구독으로 이미 읽었던 문장들인데, 어찌나 마음이 저릿저릿하게 와닿던지. 윤소정의 글은 늘 온몸으로 읽게 된다. 온 머리로 집중해 읽다 보면,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 시리게 후벼 파고든다. 가끔 다시 꺼내서 읽고 싶다.
"전쟁터에서 뛰어난 장군은 상대편에게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타깃이 된다. 산에 가보면 가장 오래된 나무는 곧거나 아름답지 않다. 곧고 아름다운 나무는 나무꾼들이 일찌감치 베어 가버리니까.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뛰어나지려고 했을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을까? 전쟁터에서 싸우는 장수는 자신의 탁월함이 아니라 집단의 탁월함을 선택한다."
"좋아하는 것 말고, 좋아 보이는 것 말고, 내 안의 좋은 것을 꺼내는 것. 좋은 것들은 그 사람의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밤 10시 반. 공부 리추얼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사랑한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배운 것을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 나에게 도착한 편지(메이트의 기록)에 정성껏 답을 하는 시간.
오랫동안 답장을 받고 싶었다. 혼자 답장 없는 글을 쓰며 꿈꾸던 순간이 바로 지금, 이 리추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알았다. 답장 없이 혼자 쓰던 편지에는 가장 절절한 독자가 있었다. 바로 나. 늘 답장 없는 편지를 썼지만 언제나 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외롭지 않았다.
리추얼 메이트의 고군분투에도 늘 나의 답장이 닿길 바라며.
탕웨이가 부른 만추를 들으면서 기록을 천천히 읽었다. 아, 만추라니! 깊어지는 가을밤에 듣기 좋은 음악이었잖아. 탕웨이의 목소리에 마음이 만든 파도가 일렁인다. 탕웨이가 부르는 노래처럼 글을 쓰고 싶다. 좋아하는 것 말고, 좋아 보이는 것 말고, 내 안의 좋은 것을 표현하는 글.
알고리즘 덕분에 유튜브 채널 [러브 포레스트]를 알게 되었다. 29살에 퇴사를 하고 세계 여행을 하는 언뜻 보면 뻔한 스토리의 주인공. 그러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퇴사도 세계 여행도 온전히 그가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낸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1달 만에 구독자 5만 명을 모은 채널에는 이유가 있었다.
러브 포레스트 일상 이야기를 보면서,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영상에 달린 많은 댓글처럼 부럽거나 “저 삶이 내가 바라던 건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사회초년생 때 나와 같은 강도로 회사 생활을 힘들어하던 친구 중 몇몇이 해외에서 살겠다고 배낭 하나만 메고 한국을 떠났을 때 그들을 힘껏 응원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굳이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는 걸까?“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내 몫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매일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좋아하는 동네 가게 몇 군데를 이용하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는 생활이 좋다. 자극에 민감하고 예민한 나에게는 매일 나의 요동치는 마음을 관찰하고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다이내믹하다.
미세한 조정을 통해 최적화한 지금 내 환경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 공간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러브 포레스트의 MBIT는 ENFP라고 한다. 다정한 꿈을 꾸고 영성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완전히 반대다. 이전에 나는 나처럼 영성과 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내향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민한 사람들은 내가 그렇듯 일상을 통제하고 싶기에 계획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꿈을 꾸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와 러브 포레스트가 그렇듯이.
시간의 세례. 누군가 나의 삶을 축복해 준다면 "평생 힘들지 말고 어여쁘게 사세요."가 아니라 "이 모든 시간의 끝에 당신이 쌓아 올린 만큼 시간의 세례를 누리게 될 겁니다." 이기를 바란다.
위험과 고통을 요리조리 비껴가는 삶이 과연 편안할까? 그런 삶은 사소한 어려움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불안과 걱정 속에 나를 밀어 넣는 삶 아닐까.
내가 원하던 [단단한 행복] 역시 내 손으로 쌓아 올린 시간을 통해 "내 삶을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안정감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언젠가 한 번은 정면 돌파가 필요하다. 내가 기꺼이 끌어안은 문제들은 무엇이었을까.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되는 것이었다.
남들이 인정하는 것을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고, 세상의 가치 체계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노력. 동시에 시대의 흐름 안에서 역풍이 아닌 순풍을 타려는 노력.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해 나를 버리지 않고, 남들과 같은 것을 오히려 나답게 하려는 노력.
균형이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무력화하는 조바심 속에서도 균형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낮 시간 동안 마음에 안 드는 검은 때를 덕지덕지 묻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면 그것을 어떻게든 소화해 내려 읽고 썼다. 어떤 것들은 흘려보냈고, 어떤 것들은 남겨두었다.
낮과 밤의 균형을 잡으며 끈덕지게 통과한 나의 시간에게도 찬란한 세례의 순간이 도착하기를. 그것이 나의 [현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언제가 가닿을 미래를 꿈꾼다.
내가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노오오력]이나 [정신 승리]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는 나를 매 순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그 변화의 방향이 좋아지는 쪽이 아니라 나빠지는 쪽이 되기 쉽다.
언젠가 글에서 “나는 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라고 쓴 적이 있다. 나는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배우기에 마치 어린아이를 키우듯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부모이자 친구이고 스승이자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