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도대체 여행이 왜 그렇게 좋냐고 물었더니 이방인이 되는 기분이 좋다고 했다. 여행지에 가면 아무도 나를 모르고, 그래서 나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감각이 좋다고. 그 말을 듣고 늘 모범생으로 살아온 그 친구가 자신의 삶을 멋진 틀에 맞춰 가꾸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남들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그 기준 안에서 최고가 되어 남과 다름을 증명해 내기 위해 얼마나 자주 답답했을까 생각해 봤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친구가 잠깐이라도 외부 환경을 바꿈으로써 그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면 나는 내부 환경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쓰는 일은 나에게 지금의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기 위한 애씀이었다.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면 현실에 대한 해석이라도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외부 세계가 아닌 내부 세계로 도망치는 나는 그래서 늘 이방인이었다. 회사 동료들과 점심은 먹어도 저녁은 같지 먹지 않는 나는 그들의 무리에 섞이지 못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동료들끼리 워케이션을 가고, 여행을 가고, 집들이를 가는 것을 보며 부러운 동시에 안도했다. 나를 부르지 않아서, 소중한 나의 저녁과 주말을 지킬 수 있어서, 그 시간을 온전히 나에게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무리에 낄 수 없어서 씁쓸하지만 끼지 않아도 되어서 동시에 자유로웠다. 대학 졸업 후 스르르 동기 모임에서 빠졌고 퇴사할 때마다 이전 직장 동료들과의 연락을 서서히 끊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유치원에서 한참을 정신없이 놀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나 혼자였다. 친구들은 서너 명씩 모여서 하나의 장난감을 같이 갖고 놀았는데 나만 혼자 요구르트병과 우유팩을 손에 쥐고 재활용 미술품 만들기 코너에서 정체불명의 창작물을 만들고 있었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공부가 요구르트병과 우유팩을 대신했다. 쉬는 시간에 친구 없이 혼자 노는 부끄러움은 문제집을 펼치는 순간 사라졌다. 입시 경쟁이 치열한 학교를 다닌 덕분에 혼자 공부를 하는 것이 이상하게 비치지 않았다. 한 반에 두세 명씩 나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분으로 살았지만, 그래서 안정된 소속이 꼭 필요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서 혼자인 게 아니라, 혼자됨은 나의 선택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불안감 없이 온전히 자유롭게 혼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면서 동료들과의 관계를 최소화하고 대신 이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맡은 일은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회사 밖에서 그 빈 마음을 채웠다. 그러나 회사 밖 활동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소속되지 않고 경계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오프라인 독서모임에서 책 이야기를 실컷 하고 뒤풀이에 가자며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 좀 해보자"라고 말하면 잽싸게 일이 있다고 둘러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5년이나 다닌 요가원에서 회원들끼리 인사를 나누다가 주말에 같이 요가하고 밥 먹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휴대폰을 보고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했다.
물리적인 소속감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 정체성에 있어서도 나는 하나의 경계 안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생긴 이후로 일회용품을 적게 쓰기 위해 가방에 텀블러와 손수건을 넣고 다닌다. 동네 빵집에 빵을 사러 갈 때는 밀폐 용기를 들고 가서 일회용 비닐 없이 담아 온다. 종이 포장된 비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는다. 제로 웨이스트 마켓에서 직접 만든 비건 쿠키를 팔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종종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좋아하는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비닐 에어캡으로 칭칭 감긴 채 배달되는 물건을 주문하기도 한다. 회사 동료들은 나를 "환경 애호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제로 웨이스트 마켓 셀러 모임에 초대되어 갔을 때 나는 그곳에 절대 속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삶을 환경 문제에 바치기로 결정한 사람들 같았다. 그곳에서는 단 한 번의 배달 음식도, 일회용 컵도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그 정도의 실천가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소비지향적인 환경 파괴자도 아니었다.
결국 이곳과 저곳을 가르는 경계선 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담을 넘을 수도 없고 넘지 않을 수도 없어서 담 위에 올라가 앉아버렸다. 담벼락 위에서 담 안쪽과 바깥쪽을 둘러보다 보면 문득 억울해지기도 했다. 이건 내가 설정한 경계가 아니었다. 나처럼 배달 음식도 시키면서 동시에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소속된 집단이 있다면 내가 있는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계가 만들어질 텐데. 아, 생각해 보니 이것도 경계구나. 왜 이렇게 사람들은 구분하고 경계를 나누고 나와 같은지 다른지 검증하려고 들까?
책 [내면소통]을 읽다가 바로 이 경계가 '나'를 만드는 본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와 타인 간의 구분, 나와 환경 간의 구분. 그 경계가 곧 ‘나’라는 자의식을 구축하는 토대가 된다. 그 경계에서 세상에 대한 지각이 일어나고, 세상을 향한 행위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의식이 타인과 자신을 향해 동시에 열려 있다”라는 것의 의미다.
고통과 번민 역시 바로 그 경계에 있다. 그 경계에 서서 외부만을 바라보는 것이 일상생활이다. 그래서 인생은 고달프기 마련이다. 내면소통 훈련으로서 명상은 바로 그 경계를 알아차리고 그 경계가 둘러싸고 있는 내면을 동시에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내면을 향하는 순간 경계는 확장된다. 경계에서 경계를 바라보고 경계에 머무는 순간, 내부에도 외부에도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내면소통>, 김주환
내가 왜 그토록 경계 주변에서 맴돌았는지 책에서 답을 찾았다.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게 존재했기에 나는 남들과 다른 '나'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 위에 서서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기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경계에 올라 경계의 안과 밖을 살피며 나의 경계를 경계 안과 밖 모두를 포함시킬 수 있도록 넓힌 것이다.
나는 환경파괴자도 아니고, 환경운동가도 아니다. 환경을 염려하면서 동시에 산업과 문명의 눈부신 결과물을 누린다. 나는 회사를 박차고 나간 프리랜서도 아니고 회사에 내 모든 것을 바치는 열혈직장인도 아니다. 회사의 월급과 안정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회사 밖에서의 내 브랜드를 구축하며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전하는 삶을 누리고 있다.
어디에 확실히 소속되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구속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균형을 맞추며 언제나 경계에 머무를 수 있다면 소속감도, 고립감도 느끼지 않은 채 어디에도 소속될 수 있고 어디에서든 혼자일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나에게 집중하라고. 그러나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외부와 타인에게서 늘 배워야 한다고. 며칠 전 또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자신의 경험과 감으로만 일하지 말고 잘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찾아보고 따라 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었다.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는 SNS에서 남들의 이야기를 잘 보지 않는다. 내가 쓴 글과 사진을 올리고, 달린 댓글을 확인하고 바로 닫는다. 세상에 멋진 영감과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지만 그걸 다 보다 보면 내 것을 고민하고 만들 시간이 없어서다. 그러나 그 책을 읽은 밤은 타인의 일상을 보고 싶어졌다. 평소에 부러워하던 마케터와 기획자,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봤다. 새벽 3시까지 이승희, 정혜윤, 서은아, 임경선의 SNS와 글을 읽었다. 그리고 아주 불편해진 마음으로 노트북을 덮고 침대로 들어갔다.
꼭 이래야 할까? 생각해 보니 남들의 이야기를 아주 안 듣고 안 보며 사는 것도 아니었다. 이승희, 정혜윤, 서은아, 임경선, 이 분들이 멋지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꾸준히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니까. 그들의 SNS를 찾아보지는 않지만 그들의 책은 간간히 사서 본다.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핵심만 꾹꾹 눌러 담은 경험과 생각의 정수다. 그 이상을 보기 위해 실시간으로 그들의 경계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경계는 그들과 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나를 모두 품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타인에게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자아를 모두 품고 있는 [본질적인 나]라는 존재가 있다. 내 안에 담긴 것을 정리하고 갈고닦는 자아, 타인의 책을 읽으며 배울 점을 모으고 적용해 보는 자아가 팀을 이루어 협업하고 있다. 그 두 자아를 모두 이끌고 있는 [본질적인 나]는 내 안에서 얻은 정보와 외부 세계에서 타인을 통해 얻은 정보를 비교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스스로를 못나게 느끼는 그 감정에서 만들어진다. 타인의 삶을 보면서 내가 원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고 계획하고 행동하며 내가 만들어진다.
그 [소통], [연결], [순환]의 과정에 내가 있다. 그 과정을 통해 내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니 나에게 집중할 때 "너무 내 안에 매몰되는 것 아닌가?" 걱정할 필요도, 타인의 생각에서 배울 때 "너무 외부를 기웃거리는 것 아닌가?" 걱정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와 타인, 나와 세상 어느 한쪽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모두 왔다 갔다 하며 성장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경계가 넓어진다. 내 경계는 나와 세상, 타인 모두를 품을 수 있다. 그렇게 충분히 넓어지면 깊어진다. 깊어지면 단단해진다. 단단해지면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지면 사랑하게 된다. 이토록 넓고 깊고 단단하고 자유로운 나의 삶을, 이 세상을, 지금 이 순간을 더욱더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