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단 Apr 09. 2020

열 살 어린 친구가 알려준 일의 기준

그렇지만, 이제 나이는 잊어야지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필요 없어요.

내가 만들 수 있는 만큼 만들어야 계속할 수 있어요.




주말 마켓에 쿠키를 팔러 간 내내 조금밖에 준비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었다. 그만큼 돈을 벌지 못해서 아쉬운 건 아니었다. 주 직업은 아직 회사원이니까, '팔릴 가능성'만 확인하면 충분했다. 이 공간을 빌려주고 기회를 제안해준 분, 물건을 사러 오신 손님들, 오늘 하루 종일 계산과 준비를 도와준 스태프들에게 미안해서였다. 4시간 동안 진행되는 마켓인데, 수량이 적어서 30분 만에 다 팔린다는 건 자랑이 아니었다.



분명 어제 하루 연차를 내고 하루 종일 만들었는데, 어젯밤에는 이만하면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마켓이 열리는 카페에 도착하니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한 가득 준비해온 다른 출점팀들의 소스, 그래놀라, 원두, 빵의 양을 보자마자 아차 싶었다. 참가를 제안해준 공간의 대표님은 처음 참가하는 셀러를 배려해서 일부러 적당히만 준비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옆자리에는 소스를 파는 친구 셀러 두 분이 있었다.


"처음엔 다 그래요. 저희도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30분도 안 돼서 품절이었어요. 그렇게 일찍 다 팔려서 신기하고 좋긴 했는데, 멀리서 오신 분들께 너무 죄송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진짜 많이 준비했어요. 그래도 또 마감 전에 다 팔리면 어쩌나 걱정이에요. 그럼 다음에는 더 많이 준비하려고요! 오신 분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할 수 있는 한 많이 준비하는 게 좋겠더라고요."


두 번째 참여한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베테랑 선배들의 말처럼 느껴졌다.



마켓 오픈 한 시간 전부터 마켓을 위해 멀리서 와준 분들이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2시 오픈이 다가오자, 11시 반부터 손님들은 "혹시 미리 사도 되나요?" 물으며 한껏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큰일 났구나. 첫 마켓 데뷔라고 멀리 사는 친구들도 오기로 했는데 이러다간 그 친구들 오기도 전에 텅 빈 바구니가 되게 생겼다. 12시 땡! 마켓이 오픈하고 예상했던 대로 손님이 물밀듯이 찾아왔다.


계산을 도와주러 온 동생은 연습할 때와 달리 손님들의 기세에 '어버버' 상태가 되어 버렸다. 갈 곳 잃은 동생의 눈을 보니 안 되겠다 싶어서 한 손에는 계산기, 한 손에는 쿠키 집게를 들고 쿠키 담기/계산/홍보/인사까지, 그간 회사원으로써 쌓은 '일 내공'을 발휘했다. 금세 적응한 동생은 마음을 다잡고 야무지게 계산을 도왔다. 첫 손님 그룹이 한 차례 지나가고 금방 쿠키 박스는 텅 비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게를 운영하고 계신 셀러 분들은 아직 재고가 여유로웠고, 비건 소스 셀러팀은 반 정도 남아있었다. 어쩔 수 없지! 자리를 정리하고, 손님이 되어 셀러분들이 준비해오신 품목들을 구경했다. 비건 페스토, 원두, 그래놀라, 누룽지... 그 사이에 할머니가 직접 농사지은 팥을 가지고 온 셀러가 눈에 띄었다.  크지 않은 크기의 밀폐용기에 예쁜 적갈색으로 빛나는 팥을 소개하고 있었다. 얼굴은 분명 20대 초반인데, 분위기는 성숙한 셀러는 나를 보더니 다가왔다.


"콩비지 쿠키 진짜 궁금했는데, 다 팔렸어요?"


"네... 얼마 준비를 못 해왔어요. 너무 아쉽고, 또 오신 분들께 죄송하고 그러네요..."


채우장에서 판매되었던 품목들


"에이 아니에요. 만들 수 있는 만큼, 준비할 수 있는 만큼만 가지고 오는 게 중요해요. 내가 얼마큼 할 수 있는지 그걸 알아야 해요. 저는 할머니가 직접 농사지은 팥을 가지고 왔어요. 양이 너무 적죠? 할머니가 이제 나이도 드시고 해서, 농사 잘 안 지으시려고 해요. 이거 팥 수확하면 햇볕에 말리고 고르고,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매번 할머니한테 졸라요. 올해도 해보자고, 조금만 더 해보자고. 그래서 이만큼 밖에 안 돼도 가지고 왔어요. 진짜 정성 들어간 팥이라 가격은 싸진 않아요. 아! 그런데 비건 쿠키 가격 너무 저렴한 거 아니에요?"


"그렇죠? 아무래도 제가 전문 업장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이기도 해서 이번엔 싸게 가격 책정했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너무 싸요! 다음에 오시면 천 원씩 더 올려도 될 것 같아요."


대화를 하다 보니 그녀의 팥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이 들어간 팥 맛이 궁금하기도 했고, 야외여서 그런지 팥이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여러 품목을 한 번에 계산해서 가격이 얼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비쌌다. 초록마을이나 유기농 매장보다도. 집에 와서 팥을 불려 밥을 지어먹으니 이 정도 맛이라면 비싸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내공은 나이와 상관없구나


집에 돌아와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찾아서 들어가 보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대학생이었다. 스물두세 살 정도일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까. 일의 중심에 자신을 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이 만든 것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다른 이들이 정한 기준과 상관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구나.


주말 마켓에서 장사를 해 봤다는 경험보다, 귀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공은 정말, 나이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생각의 내공, 깊이의 내공은 얼마나 고민했는지, 얼마나 균형 잡혀 있는지의 문제이다.


일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어떤 분야이던 플랫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기업에 들어가려 하는 것도, SNS 채널을 운영하는 것도, 기획사에 들어가려 하거나, 이렇게 누군가의 마켓에 셀러로 참여하는 것도 다 플랫폼의 힘을 빌려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도 같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플랫폼의 다른 참여자들이 만든 기준에 휩쓸리기 쉽다. 플랫폼의 문법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유튜버들이 대형 MCN 회사와 불공정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는 기사를 봤다. 어떤 유튜버는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주제를 다루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의 중심이 자신이 되기 어렵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콘텐츠와 상품을 만들면서도

언제나 중심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고,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계속해나가고 싶은지.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도, 티소믈리에 워크숍도, 쿠키를 만들어 파는 일도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찾으러 와준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읽히기만을 팔리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다르다.


나는 눈물 쏟으며 회사를 8년이나 다닌 끝에 요즘에야 하는 생각들을, 이미 하고 있는 대학생 친구를 알게 되어서 참 좋다. 앞으로 친구를 사귀면 나이를 묻지 않기로 했다. 나이를 알고, 호칭을 정리할 필요가 굳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면 그만이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친구면 충분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친구 사귀는 일이 즐겁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