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 블랙퍼스트와 보늬밤 마들렌
달콤한 디저트는 친절하다. 불쑥 찾아와 나 어떠냐고 묻는 맛이 있는 반면, 스르르 다가와 괜찮으냐고 물어주는 맛이 있다. 자신이 아니라 내가 괜찮으냐고 물어주는 친절한 맛. 내가 디저트를 즐겨 먹는 이유는 그런 다정함 때문이다.
또다시 코로나가 심해져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긴 주말이 남았다. 집에 있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코로나 이후 더 강해졌다. 예전에는 약속 없는 주말이라도 집앞 산책은 꼭 나갔다. 햇볕을 쬐면서 걷지 않으면 몸이 무겁고 처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집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이곳 책상 앞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가벼운 운동은 언제나 반갑지만 예전처럼 꼭 하루 한번은 외출해야 하는 습관은 없어졌다.
모처럼 한가한 날에는 손이 많이 가는 디저트를 만들기 좋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지난 가을 만들어둔 재료들이 한가득이다. 추석에 부모님 집에서 받아온 무화과 두 박스로 만든 무화과 캐러멜 잼, 햇밤이 나온 것을 보고 만들어둔 보늬밤. 무화과잼과 보늬밤을 갈아서 진하게 단 보늬밤 무화과 크림을 만들었다. 보늬밤만으로는 크림을 만들기에 단맛이 부족하지만, 평소보다 달게 만들어둔 무화과잼과 함께 갈아내니 한 입맛 먹어도 온 몸에 달콤한이 찌릿하게 전해진다. 이 크림을 마들렌 배꼽 안에 넣어보기로 했다. 크림 마들렌을 만들려고 입구가 길고 좁은 깍지까지 사 두었는데 내내 쓰지 않던 것이 생각났다.
비건 디저트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슴슴하고 꾸덕한 식감과 고소한 맛에 빠져들었지만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바로 계란이다. 반죽을 부드럽게 부풀려주는 성질도 그렇지만 계란 넣은 마들렌만이 낼 수 있는 풍미 때문이다. 계란 과자를 먹을 때 느껴지는 계란 특유의 풍미가 생각나서 마들렌 만큼은 비건이 아니라 계란과 버터를 넣고 만들고 있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기도 하다.
배꼽이 몸통만큼 높이 솟은 마들렌에 슈크림 깍지를 찔러 넣고 크림을 가득 채워주었다. 크림을 넣으려고 오늘은 마들렌에 유자나 레몬으로 맛을 내지 않았다. 단순하게 구운 마들렌에 진한 크림의 조화를 느끼고 싶었다. 크림을 넣은 디저트들은 반으로 가르는 순간이 가장 긴장된다. 크림이 예쁘게 잘 들어갔을까, 양이 적당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단면을 잘라본다. 단면이 예쁠 때 '와 이거다!' 싶은 그 순간을 위해 디저트를 굽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진한 단맛의 디저트를 먹을 때는 예외없이 홍차를 고른다. 오늘의 선택은 멜버른 블랙퍼스트.
멜버른 블랙퍼스트는 호주의 티 브랜드 T2 제품이다. 바닐라향의 홍차로, 리쉬티의 블랙 바닐라와도 비슷하다. 블랙 바닐라가 추운 겨울날 밤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마시는 바닐라향이라면, T2는 주말 아침 거실에서 온 가족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며 마시는 바닐라향이다. 은은하고 부드럽게 단 바닐라향이 달콤한 디저트의 맛과 만나 한층 더 달달함을 더해주지만 홍차 특유의 수렴성 (혀를 죄는 듯한 감각)이 단맛을 중화시킨다. 홍차의 수렴성과 가향된 홍차의 향을 극대화해서 느끼는 방식을 소개한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 안의 달콤한 기름기를 씻어내면 다음 한 입의 디저트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아무 생각없이 차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며 책상에 앉아있는 이 시간을 두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도 없이, 더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에 대한 욕심도 없이, 넉넉하게 모아둔 돈도 없이 내일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가끔 내일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하지만 내일에도 내가 얻고 싶은 순간은 지금과 같은 시간이다. 한가로이 앉아 창가의 햇살을 즐기며 차 한잔과 내가 만든 디저트를 먹는 일. 누군가는 이 여유를 더 오래 즐기려면 지금과 같아선 안 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럴까, 내일은 과연 어떻길래, 우리는 살아보지 않은 시간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
재택 근무 유연 근무제를 경험하면서 집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집에서 살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밖에서 일하며 보낸다. 집은 내일 일을 하기 위해 오늘 편안히 저녁을 먹고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평일 오후 세시에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있어본 경험은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어쩌면 이 시간을 누리기 위해 사는 건지도 모르는데. 집을 누리기 위해 일을 했던 건데 정작 집의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순간들을 누리지도 못하고 있었구나. 집이라는 정체성의 많은 부분이 '투자 수단'이었구나 새삼 느끼게 되었다.
오늘 이 순간만큼은 집을 '재산'이 아니라 '휴식의 공간'으로 느껴봐야겠다. 내가 온전히 '나'로서 누릴 수 있는 공간, 어쩌면 코로나는 나에게 집을 선물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접 고르고 구매해서 마셔본 차를 소개합니다.
브랜드명 | T2 (국내 수입 판매 되고 있어요)
제품명 | 멜버른 블랙퍼스트 (Melbourne Breakfast)
가격 | 39,000원 (100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