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홍차와 옥수수 쿠키
홍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국가는 어디일까?
구수한 풍미의 다즐링 홍차를 생산하는 인도, 실론티로 유명해진 스리랑카를 떠올릴 수도 있고, 유럽식 티타임 문화를 주도한 영국, 섬세한 가향차 브랜드 마리아쥬 프레르를 좋아한다면 프랑스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홍차를 즐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생산국은 아닐 수 있지만 고유한 매력을 가진 홍차를 생산하는 지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홍차가 생산된다. 티 워크숍을 준비하며 보성, 하동, 제주에서 생산된 발효차를 마셔보았다. 오늘 디저트와 페어링 한 차는 보성 홍차다.
보성에 가면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녹차밭이다. 파릇파릇한 초록빛 차나무가 넓게 펼쳐진 녹차밭에서 찍은 사진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녹차밭은 엄밀하게 말하면 녹차밭이 아니라 '차밭'이다. 한 종류의 찻잎을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서 녹차가 되기도 하고 홍차가 되기도 한다. (백차와 우롱차, 보이차도 모두 같은 차나무에서 시작된다.) 찻잎을 따내어 녹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 과정을 추가하면 홍차가 된다. 우리나라의 홍차는 다즐링이나 아쌈, 실론처럼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강 발효차와는 달리 부드럽고 연하다. 녹차와 유럽식 홍차의 중간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는 커피 대신 오전에 잠을 깨우는 홍차이다. 그만큼 강하게 발효된 홍차의 수렴성 (떫은맛이라고도 표현되는 혀를 조이는 맛)이 도드라진다. 정신이 번쩍 들게 잠을 깨우는 홍차가 영국식 홍차라면, 우리나라의 홍차는 주말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 천천히 몸을 깨우는 홍차다.
티타임을 준비할 때 보통 과자를 먼저 만들고 그에 어울리는 차를 고른다. 오븐에서 나온 과자가 한 김 식으면 맛을 보며 차 서재로 향한다. 책 대신 차로 채워진 책장을 보며 입 안의 맛과 사이좋게 어울릴 차를 머릿속으로 조합해본다. 차의 맛과 향도 물론 중요하지만 입 안에서 과자에 차가 스며드는 순간이 어떨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차와 과자 중 어느 한쪽의 성격이 뚜렷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면 다른 한쪽이 할 말을 다 하지 못한다.
유럽식 블렌딩 홍차, 가향 홍차 문화에서 스트레이트 티를 즐기는 문화로 차문화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면서 '차과자'의 영역도 넓어졌다. 버터 풍미 가득한 마들렌이나 케이크, 스콘이 얼그레이나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와 잘 어울렸던 것은 강 발효 홍차의 '수렴성' 때문이었다. 혀를 조이는 떫은맛을 가진 타닌 성분이 많이 우러나는 강 발효 홍차들은 입 안에 남은 유지방을 씻어주는 역할을 해서, 리치한 디저트를 중화시켜준다. 진하게 단 케이크를 먹을 때, 캐러멜 마끼아또보다 아메리카노가 잘 어울리는 것과 같다.
첨가된 '향'이 매력 포인트인 '가향차'의 경우 진한 디저트의 단맛만큼 향기 성분들의 존재감도 강렬하기 때문에 디저트가 차의 풍미를 해치지 않는다. 가향차의 경우, 대개 합성향료를 쓸 수밖에 없다. 천연 향료를 쓰면 차가 우리에게 오기 전에 그 향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 티는 찻잎 자체만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러 층위의 향이 레이어드 된 가향차와는 달리 차분하게 맛을 관찰할수록 선명하게 드러난다. 차 명상을 할 때, 가향차보다는 스트레이트 티가 어울리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발효도가 낮은 차, 한 종류의 차로 만든 스트레이트 티의 인기와 더불어 구수한 떡이나 양갱 같은 한식 디저트, 담백한 비건 디저트가 차과자로 자주 소개된다.
문화의 발전 방향이 그렇다. 처음 한 분야를 알린 '주류'를 통해 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양적으로 성장을 하게 되면 넘쳐흘러서 점점 더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단순한 것, 기본적인 것에 대한 요구도 생겨나는데, 요즘의 차문화가 그렇다. 티타임 대신 '찻자리'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지금의 차 문화는 서양의 차문화와는 다르게 화려함보다는 소박함과 단순함을 지향한다. 무작정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세부 분야를 찾아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찻자리를 재구성한다는 느낌이 든다.
옥수수 쿠키는 톱니 깍지로 반죽을 얇게 짜내어 굽는 쿠키이다. 오일의 함량이 높아 구워진다기보다 튀겨지는 것에 가깝다. 얇게 튀겨진 옥수수 과자는 어릴 때 먹던 꼬깔콘과 비슷한 맛이 난다. 그보다는 단맛과 짠맛이 은은해서, 쿠키를 씹을수록 천천히 느껴지는 옥수수 쿠키를 제대로 즐기려면 중립적인 차가 좋겠다. 하동의 녹차는 풀향과 단맛이 진해서 넘어가고, 리쉬의 바닐라 민트 차이는 향이 너무 풍부해서 넘어간다. 시선의 끝에 보성 홍차가 보인다. 아, 그렇지. 보성 홍차가 있었다.
뜨겁지 않게 따뜻할 정도로 식힌 물에 홍차를 넣고 차곡차곡 도시락통에 옥수수 쿠키를 쌓아 올린다.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려고 사둔 도시락이 앙증맞게 옥수수 쿠키와 모양도 색감도 잘 어울린다. 겨울의 낮고 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나의 작은 작업실 책상에 앉아 책도 펴지 않고, 휴대폰도 손에 쥐지 않고 가만히 찻자리를 즐긴다. 나에게 허락된 이 환한 오후에 집중하고 싶다. 나를 홀리듯 움직이는 인스타그램을 보지 않고, 머릿속을 헤집는 재미난 책도 보지 않고, 차를 마신다. 홍차를 얼굴 가까이에 가져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 모금 입에 문다. 그대로 삼키고 옥수수 쿠키를 오독오독 먹고, 또 차를 마신다. 한 때는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아서 바쁘게 살았는데, 요즘은 가만히 있고 싶어서 바쁘게 산다.
직접 고르고 구매해서 마셔본 차를 소개합니다.
브랜드명 | 청룡다원
제품명 | 유기 발효차 (홍차, 보성 홍차)
가격 | 15,000원 (30g)